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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거북이 Feb 23. 2021

나에게는 또 한 명의 가족이 있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진 않았지만, 정이 있던 그 시절

 어린 시절 나는 간호사가 우리 가족의 일원인 줄 알았다. 80년대 초 중반,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항상 우리 집에서 같이 숙식을 하는 간호사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이셨고, 작은 병원이라 1명의 간호사가 있었다. 우리집 건물은 1층은 병원, 2층은 가족들이 기거하는 집이었다. 지금은 이런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취업이 어려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와 이렇게 일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와 내 동생들은 우리 집에 있는 간호사를 ‘이모’라고 불렀고, 부모님께서는 김양, 이양 이렇게 성 뒤에 양자를 붙여서 부르셨다.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한 호칭이지만, 그 당시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호칭이었던 것 같다. 나는 원래 이름이 김양, 이양인 것으로 잘못 알고, 우리집 이모들은 왜 항상 이름이 외자일까? 라는 의문을 품었었다.


 간호사가 하는 일은 아침에 병원 문 열기 전에 혼자 청소를 하고, (화장실 청소 포함, 입원실 침구류 먼지 털기, 일광 소독하기, 진료 수술 도구 열탕 및 자외선 소독), 환자들이 오면, 접수하고, 원장(아버지)께 인터폰으로 연락, 환자 개인의 차트를 뽑아서 진료 전 아버지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처방을 받으면, 주사를 놓거나, 상처를 소독하는 등의 일을 하고, 제약(의약분업이 되기 전 이었다.)을 하고, 수납을 하고, 제약사나 다른 손님이 찾아오면 커피를 내어 오고, 거즈나 소독 솜도 미리 잘라 두고, 겨울에는 석유 곤로에 불도 지피고, 화분에 물도 주고, 아무튼 지금은 간호사들이 당연히 하지 않을 잡다한 일까지 모두 혼자 처리를 하였다.


환자가 없어서 한가한 시간이면,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하기도 하였는데, 당시에는 TV도 비교적 비싼 가전제품이라 우리 병원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환자들이나 간호사 이모도 TV가 없어서 불평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우리집을 거쳐간 몇 명의 간호사 이모 중 시간이 빌 때, 뜨개질을 하던 이모와 종이학을 접던 이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뜨개질을 하시던 분은 처음에는 서툴었는데, 몇 년이 지나자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아버지 책상의 책상보와 의자에 등받이천, 방석, 명패 깔개, 심지어 필통 깔개까지 다 뜨개질로 만들어 버렸다.


종이학을 접으시던 분은 학 천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좋은 배필을 만났으면 하는 희망에서 학을 접는다고 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천 마리가 훨씬 넘게 접었던 것 같다.


어깨너머로 뜨개질은 배울 수 없었지만, 종이학은 꽤나 이른 나이에 접는 방법을 배워 친구들에게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다들 지금과 비교하면 워낙 가난하게 살던 때라, 간호사 이모들은 대개 20대 초 중반이었는데 간호사가 된 이유는 결혼 준비, 상급학교 진학 준비, 또는 동생들 학업을 돕기 위해서 등등이었다. 소박하면서도 확고한 목적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나는 어린 시절에 20살 정도면 진짜 어른이 되고도 충분한 나이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초등학교 입학해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고 나서야, 나의 어른 기준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대 초반의 사람을 내가 지칭하는 호칭은 아저씨, 아줌마였다. 나는 아줌마가 기혼자에게만 쓰는 단어인지도 몰랐다. 그저 20살이면 완전한 어른이니까 아저씨, 아줌마라고 불러야 되는 줄 알았다.


 그 당시 간호사들이 하던 일 중에,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힘들었겠다 싶은 일은 바로 차트 정리와 환자 응대이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어서, 아니 있었지만, 다들 안 가지고 있었고, 사용법도 몰라서, 세금 증빙을 위해서는 매번 환자 차트를 수기로 작성, 보관하였다가, 사본을 따로 만들어 세무서에 신고했었다. 복사기는 그 당시에 있었는데, 복사보다는 왜 인지는 모르지만 먹지를 깔고, 다시 차트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으며, 주판으로 계산을 하여, 제출할 자료를 만들었는데,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난다. 큰 상에 둘러앉아서, 아버지, 어머니, 간호사 이모가 주판알을 튕기며, 차트를 넘기며 분주하게 일 하던 것을 자주 봤었다.


차트는 환자 이름에 따라 ‘ㄱ,ㄴ,ㄷ,’ 순으로 항상 분류되어 있었고, 월별로 또는 분기별로 종이 색깔이 달랐던 것 같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그리고, 흰색도 있었던 것 같다. 한글도 겨우 읽던 내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필기체의 영문자를 척척 읽어내는 간호사 이모를 보며, ‘와 진짜 머리 좋은가 보다.’ 라고 속으로 감탄했던 기억도 난다.


환자 응대는 아마도 가장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배움이 짧은 분들도 많고, 병원에 대해 이해가 떨어지는 분들도 있어서, 진료과목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병원에 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 병원은 안과가 아닌데, 눈 치료를 받으러 오셔서 도리어 다른 병원 가라고 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TV에 광고가 나오는 약으로 꼭 처방해 달라는 사람, 왜 똑같은 감기인데 저번보다 알약 숫자가 늘었느냐고 불평하는 사람 등등 지금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이런 사람들을 일일이 웃으며 응대하였는데,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간호사 이모들과는 항상 친하게 지냈다. 대가족이 더 많던 시절이라, 나 같은 어린 아이를 대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을 것이다. 항상 이모들 간식을 같이 먹고, 동화책 읽어 달라 조르고,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매일 귀찮게 하였는데, 딱히 거절당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출퇴근하는 간호사 이모가 왔다. 이제는 김양, 이양이 이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집이 가까우면 당연히 우리집에서 잘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너무나 어색하고, 생소했다. 처음으로 우리 가족이 아닌 듯 느껴져서 친해지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부모님께서 완고하신 편이라 초등학교 3학년까지 용돈이 아예 없었다. 당시 백 원하는 새우깡 한 봉지나 오십 원 하던 알사탕을 매일 사 먹는 친구가 너무 부러웠었다. 나도 하루에 백원만 마음대로 쓸 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백 원짜리 동전을 길을 가다가 줍게 되었다. 당시에는 신용카드도 없어서, 다들 현금을 가지고 다니던 때라 그런지 의외로 길에서 동전을 줍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재빨리 과자를 사 먹고, 그 이후로는 어디 떨어진 동전이 또 없나? 하고는 매일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유레카, 우연히 보물창고를 발견해 버렸다.


엉덩이에 주사를 맞기 위한 침대에서 바지를 내리다가, 동전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많았다. 주사는 맞아야 되고, 당황해서 떨어진 동전을 줍다 보면 침대 아래 깊숙이 들어간 동전을 미처 챙기지 않고, 놔두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침대 아래를 뒤져보면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는 꼭 나왔다.


한 동안은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했고, 행복하였다. 그러다가 두 살, 세 살 터울인 동생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갑자기 경쟁이 치열 해졌다. 막내 동생은 거의 매일 침대 밑을 뒤지고 다녔고, 동전을 항상 찾는 사람은 막내 동생이었다. 먼지가 굴러다니고, 어둡고 비좁은 침대 밑을 뒤지고도, 항상 소득이 없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이모는 누가 동전을 떨어뜨리고 가면 나에게 바로 알려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간호사 이모가 동전이 떨어졌다는 것을 나에게만 알려주었고, 항상 뒤져보면 오백원짜리 동전이 한 개 나왔다. 당시에는 정말 몰랐지만, 누가 한 일인지 이제는 당연히 알고 있다. 감사할 따름이다. 세월은 흘러서 나도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러고 나서는 간호사 이모와 친해지기가 어려웠다. 이모라고 부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도 않게 되어서, 어떻게 불러 드려야 할지 몰라서 말을 붙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세월은 계속 흘러,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여러가지 사정으로 개인 병원은 문을 닫게 되었고, 더 이상의 간호사 이모는 없었다. 나는 대학병원과 같은 큰 병원보다 조그마한 동네 개인병원 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병원 대기실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너무나 많은 옛 추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파서 가는 곳인데, 싫지만은 않은 이유는 김양, 이양, 아버지,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내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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