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의 겨울 새벽, 나는 2주간의 베트남 출장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연말과 새해를 모두 베트남에서 보냈기에, 한국에 도착하면 즐겁고 기뻐야 하나, 당시 내 기분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두 달 전에도 베트남 출장을 갔었는데, 암 투병 중이시던 장인어른의 병세가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 그리고, 내가 출장 복귀 후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두 달 전의 출장 때 일이 기억에 남아서, 이번 출장 시작부터, 끝까지 내 마음은 무거웠다. 두 달 전 출발 때, 마침 모닝캄 회원이 되고 난 이후, 첫 비행기 탑승이라, 전용 수속을 하면서, 한 순간 뿌듯하였고, 투병 중이신 장인어른께 술이나 담배 대신 무엇을 사 드리면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출장 복귀 후에 항암치료를 받으실 예정이었기에, 어떻게 준비를 할 것인지 잠깐 고민도 하였었다. 진짜 죄송한 이야기지만, ‘장모님이나, 와이프가 잘 알아서 어련히 내가 할 일을 정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며, 출장 가서 할 일이나 걱정하며, 공항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이른 시간이라 공항 내 편의점과 안내 데스크, 시외버스와 리무진 버스 티켓 판매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표를사고는 바로 밖으로 나왔다. 베트남은 영상 20가 넘는 날씨였는데, 여긴 영하 15도였다. 때마침 눈도 내리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시렸다. 캐리어를 끌고 버스 정거정에 서 있는데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계속 밖에 서 있고 싶었다. 베트남의 덥고 습한 공기와는 다른 아주 차갑고, 깨끗한 겨울 바람이 답답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것만 같았다. 한 호흡 들이마실 때마다, 냉수 한 사발을 쭉 들이마시는 듯한, 청량감이 느껴졌고, 내쉴 때마다, 안 좋은 생각들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30분이 넘는 시간동안 그렇게 혼자 눈과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혼자 청승맞게 호텔방에서 보낸 새해를 마치 보상이라도 해 주려는 듯, 눈은 소복소복 하얗게 내렸다.
그렇게 출장 복귀 후 하루가 지나자 왼쪽 발목이 아파왔다. 발목 뒤쪽 아킬레스 건 쪽이었는데, 처음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은 오른발도 동일한 부위가 아프기 시작하였고,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다. 걷는 게 고통스럽게 느껴질 정도가 되자, 병원에 갔는데, 아킬레스 건염 진단을 받았다. 기온 차가 크게 날 때, 근육이 늘어났다, 급속도로 줄어들면서 발생할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듣고도, ‘뭐 며칠 아프다 낫겠지.’라고 가볍게 넘겼었다.
문제는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도 점점 상태가 나빠져갔다. 아킬레스 건 통증 때문에 평소와 다르게 걸어서인지, 갑자기 발바닥이 엄청나게 아프기 시작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송곳으로 발바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었다. 아킬레스 건 통증 따위는 싹 다 잊어버릴 수 있었다. 송곳에 찌르는 통증에 비하면 그 정도는 그저 손가락으로 푹 찌르는 아픔 정도였다. 결국 족저근막염 진단을 받았고, 그때부터 고통스러운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매일 발에 온찜질도 하고, 마사지도 하고, 틈틈이 물리 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지만, 계속 아팠다. 아침에 특히 아팠는데, 아침에 잠에서 깨서 침대에서 내려오며, 한 발 내딛는 그 순간이 너무나 두려웠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이후 실의에 빠져 있는 와이프를 돕지는 못할 망정, 짐이 되어 버렸다. 걸을 때마다 아프니, 겨우 회사에 다녀오는 정도만 할 수 있었고, 마트에 가거나,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거나 하는 걸어야 하는 일들은 가까운 거리라도 다 와이프가 도맡아서 해야만 했다.
사실 눈치도 보였었다. 암 투병 중에도 장인어른은 아픈 내색을 많이 하지 않으셨는데, 나는 겨우 발바닥이 아픈 정도로, 유난을 떠는 것으로 보일 것만 같았다. 두세 달이 지나서야, 괜찮아졌는데, 그 이후로 족저근막염으로 다시 아파본 적은 없다. 너무 고생을 하여서, 신발도 항상 편한 것만 신고, 무엇보다 추운 곳에 가야할 때면, 두터운 양말을 신고, 발목 스트레칭도 충분히 하곤 한다.
물론 그 이후로도 계속 해외출장을 갔으나, 이젠 더 이상 이른 아침에 밖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공항 안에서 내다보는 것만 해도 발바닥이 아파지는 것 같아 겁이 나서 나갈 수가 없었다. 육체적인 아픔도 이렇게 오래 기억이 남는데, 당연히 장인어른 임종은 더 깊게 기억에 남았다. 인천공항을 처음 가 본 것은 2001년도였다. 그 이후 여러 번 인천공항에 갔었지만, 지금의 나에게 가장 기억 남는 순간은 당연히 족저근막염에 걸리기 위해 눈을 맞으며, 장인어른께 아무런 도움도 못 되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서 보낸 시간이다.
별로 잘난 것도 없는 사위지만, 대기업 다닌다고, 친구분들에게 자랑하시고, 상견례를 앞두고, 병원에 입원하셔서, 결국 상견례는 미뤄지고, 대신 병문안을 갔었던 내 손을 꼭 잡고, 미안하다고 연신 말씀하셨었다. 결혼식 때는 와이프와 같이 입장해서 나에게 손을 넘겨주며, 아주 무심하게 “자 빨리 받아라.”라며, 물건 건네 듯, 와이프 손을 내게 쥐어 주셨다. 꾸밈없이 그리고, 본인의 아픔과 슬픔은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던 분인데, 이제는 이 세상에 없으시다. 비행기를 타면, 장인 어른이 계신 저 세상은 아니지만, 다른 세상에 가게 되어서 그런지, 항상 공항에 오면 장인 어른 생각이 많이 난다.
언젠가 또 내가 공항에 왔을 때, 눈이 내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발이 그렇게 아팠었지만, 아마도 나는 내리는 눈을 보면서, 다시 그 날처럼, 밖에 나가서 서 있을 것인지, 말 것인지 여러 번 고민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리움, 아쉬움, 돌아가셨을 때 아픈 마음보다 더 아파버린 내 발, 죄송함, 무엇 때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