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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거북이 Feb 12. 2021

할머니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일흔 살 이셨다. 16살에 시집와서 나이 마흔에 막내아들인 우리 아버지를 낳고는, 장가 가는 것도 못 보고 죽을 것 같다고 펑펑 우셨다고 한다.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마 가장 좋아한 사람은 할머니였을 것이다. 집에서 기다리다가, 새벽에 내가 태어났다는 전화를 받고는 만세를 부르셨다고 하셨다.


평생동안 만세를 부르신 일이 딱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1945년 8월 우리나라가 광복할 때였고, 또 한 번은 내가 태어났을 때였다. 한일병합 이전, 거의 조선시대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옛날 조선시대 선조들처럼 딸보다 아들을 귀하게 여기셨고,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 장손이라고 하시며 좋아해 주셨다.


옛날 어릴 적 사진을 뒤져보면, 내가 할머니 등에 업혀 있는 사진을 쉽게 여러 장 찾을 수 있다. 할머니께서 나를 정말 많이 업어 주셨다. 솔직히 할머니 외에 다른 사람에게 업혔던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지금도 할머니 등에 업혀서 할머니의 잘 빗겨진 머리에서 나는 기름 냄새와 풀 먹인 모시옷에서 나는 냄새가 기억난다.


이십 년 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 나는 그 냄새를 더 이상 맡아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직 기억난다. 1년 반 터울로 동생들이 둘이나 연이어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는 어머니의 품에서 밀려났고,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시간이 많아졌다. 잠도 동생들은 안방에서 자고, 나는 할머니와 같이 건너방에서 잤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우린 나이차이가 많이 난 만큼 너무 생각이 달랐다. 생각이 다른 만큼 쉽게 오해도 생기고, 갈등도 많았다.


할머니 등에 업힌 나


 어린 나이였지만 나와 할머니의 위생과 청결의 차이는 컸다. 밖에서 놀다가 손이나 얼굴이 더러워지면 할머니께서는 하얀 손수건을 꺼내 침을 묻혀 닦으셨다. 그리고, 아직 어려서 숟가락, 가락질이 서툰 나를 위해 반찬이나 음식을 손으로 집어서 주시는 것도 다반사였다. 손으로 찢어 물에 헹궈서 주는 김치는 정말 최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나는 이런 할머니에게 더럽다는 말을 했었다. 내가 오해했고, 잘못한 일이었다. 할머니께서 살아온 시대가 어떤 시절이었는지 그때는 몰랐었다. 가난하고, 부족한 시절이었고,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통에 자식들 키우면서, 손수건 적실 물이나 가족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의 수저가 없는 경우도 많았을 텐데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자꾸 미워진다.


할머니께서 교회나 이웃집에 갈 때, 나는 항상 같이 갔었는데, 부모님께서는 일도 많고, 나보다 어린 동생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었다. 이웃 친구집에서 화투를 치시거나, 이야기를 하실 때, 너무나 심심하고, 지겨웠었다. 보통 그런 곳에는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들도 없었고, 과자나 사탕도 맛없는 계피나 박하 맛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악은 교회였다. 완전히 엄숙한 분위기에 확 기가 눌려서 뭣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요구르트나 마시고, 주보로 종이배나 만들고 나면, 무작정 가만히 앉아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예배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이 길게 느껴졌었다.




마냥 좋게만 대해주신 건 또 아니었다. 엄할 때는 무척 엄하셨는데, 할머니와 같이 자면서 이불에 오줌을 싸면 무척 심하게 혼났다. 특히나 겨울에 솜이불에 지도를 그리면 더 혼이 났었던 것 같은데, 그 순간만큼은 나보다 이불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듯하였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이웃집에 오줌 쌌다고 소금을 얻으러 갈 때였는데, 정말로 창피했다. 너무 창피해서 이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서는, 나는 항상 자기 전에 여러 번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굉장히 빨리 소금 얻으러 다니는 일을 졸업하게 되었다.


오모짱, 구루마, 벤또, 즈봉, 뎀뿌라, 꼬뿌, 전부 할머니께서 사용하시던 단어이다. 나는 이게 사투리라고 생각했었고, 반 이상 무슨 뜻인지도 몰랐었다. 일본어라는 것을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고, 할머니께서 할아버지와 함께 일본 오사카에서 광복 이전까지 사셨다는 것은 더 한참 지나서 알게 되었다. 나는 그저 할머니는 사투리를 엄청 심하게 쓰신다고 여겼고, 이것 역시 싫었다. 이런 여러 문제점 때문에, 나는 빨리 할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8살 때, 내 방이 있는 큰 집으로 이사하면서 혼자 자게 되었는데, 무섭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할머니와 다른 방을 쓴다는 것이 기뻤었다. 할머니 방에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초상화와 오래된 장롱, 거울이 항상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TV가 있는 곳이었다. 초등학교 때 정해진 TV 시청 시간은 일주일에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TV를 더 볼 수 있는 방법은 부모님 몰래 할머니 방에 숨어 들어가서 보는 방법 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주무실 때, 몰래 할머니 방에 가서 TV를 보곤 했는데, 당시에는 KBS1,2, MBC, EBS 4개 채널 밖에 없었다. 밤 늦게 하는 프로그램 중에 내가 볼 만한 것은 거의 없었는데, 토요일 밤에 하는 주말의 명화는 꼭 챙겨 보았다.


문제는 그렇게 일주일을 기다려서 밤 늦게 부모님 몰래 보는데, 재미없는 영화일 경우 그렇게 억울하고 분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이런 사실을 부모님께 말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꼭 봐야 하는 프로그램이 없는 내가 아는 유일한 어른이셨다. 무슨 뜻이냐 하면, 외갓집에 가면, 외할아버지께서 씨름을 보시고 있을 때는 절대 채널을 돌려 다른 프로그램을 볼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께서 드라마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내가 원하는 것을 보려고 떼를 써봐야 헛일이었다. 생방송을 놓치면 딱 한 번 있는 재방송을 봐야만 하던 시절이라 아마 내가 그런 상황에 놓였더라도 손자에게 쉽게 TV 채널을 양보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내가 TV를 볼 때면 그게 뭐가 재미있냐며, 가끔씩 핀잔을 주시기는 하셨다. 지금은 미드라고 부르는 미국 외화의 경우 당시에는 다 더빙을 해서 우리말로 방송이 되었는데, 할머니께서는 외국 사람들이 어떻게 한국말을 저렇게 잘 하냐며, 매번 감탄하셨다. 더빙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 드렸지만, 할머니께서는 끝내 이해를 못하셨다.


어느 날 할머니와 둘이 TV를 보다가 탤런트 이재룡씨가 아기띠를 하고 아이를 업는 광고가 나왔다. 할머니께서는 놀라서 이제는 남자도 아기를 업는구나. 내가 어릴 때는 남자가 저런 짓을 하면, 호되게 경을 칠 일이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아이를 업는 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몰라서 꽤 오랜 시간동안 고민을 하였었다.


90년대 초반에는 남자가 아이 업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내가 대학생이 되고, 군대 전역 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머니보다 먼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임종을 겪어 보았고, 나이도 몇 살 더 먹은 후라, 그렇게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상하게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눈물도 안 나왔다. 슬프기 보다는 허무한 감정이 솟구쳤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필연적으로 일어날 슬픈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 같았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내가 할머니께서 이젠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못 받아들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았다. 텅 빈 할머니 방을 나는 그 이후로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 방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 방에 머물러 있으면 슬픈 생각이 들 것 같기에 알아서 피한 것 일지도 모른다.


 몇 년 후, 우리집은 이사를 했다. 할머니 없이 다섯 명, 남은 식구들만으로도 우리 집은 행복했다. 시간이 흘러서 나와 동생들은 한 명, 한 명, 독립해서 집을 떠나게 되었고, 이제는 모두 다른 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바쁜 나날 속에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가다, 드디어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식장에서 가장 반가웠던 분은 바로 큰고모였다. 연세가 많으셔서 오시기 힘들었을 것인데, 큰조카 결혼식이라고 곱게 한복을 입고 참석하셨다. 신랑측 앞좌석에 앉으신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 연세와 이제는 비슷한 고모님은 진짜 할머니 모습과 똑같아 보였다. 그 날 부모님보다 큰고모님을 더 많이 쳐다보았다. 큰고모님을 꼭 안았을 때, 진짜 할머니라고 한 번만 불러보고 싶었다.


 꽤나 오랫동안 할머니의 어부바에 대해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살았는데, 우리 딸이 태어나자, 할머니께서 나를 업어줬었던 생각이 너무 많이 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나를 안거나 업거나 할 때, 내가 전혀 불편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힘들이지 않고 하셨는데, 나는 우리 딸을 안거나 업는 것이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께서 나를 그렇게 쉽게 업으셨는데, 나는 왜 이게 힘든 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포대기로 나를 감싸고는 끈을 꽉 졸라매셨는데, 그렇게 하면 진짜 옴짝달싹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도리어, 포근하고, 안정감이 느껴졌었는데, 내가 어떻게 업어도 우리 딸은 불편해서 울고불고 짜증을 냈다. 그래서 와이프가 항상 업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나보다는 낫지만 아무리 봐도 할머니의 어부바보다는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와이프는 허리가 아프다며 꽤 오래 치료도 받았다.




이제는 시간이 너무 오래 되어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면, 일단 내 기억이 정확한 건지 의심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흐려진 탓이다. 기억은 흐려지지만, 내가 받았던 사랑은 잊히지 않고,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내가 내 자식들을 키우면서 할머니의 사랑을 계속 발견하고,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사랑만큼 못 줘서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그래도 위안 삼자면,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이렇게 할머니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겨울 밤은 깊어만 가는데, 나는 감히 이 글을 끝낼 수가 없어서, 자꾸만 창 밖을 내다보게 된다. 오래된 일이라 더 이상 쓸 게 없지만, 할머니의 어부바에 대해 아직 반의반도 글로 못 옮긴 듯하다. 그 포근함, 안락함, 그래서, 이하 공란으로 일단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할머니와 나


이하 공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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