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위한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옷은 단순히 기능이나 미학의 대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존엄에 응답하는 존재일 수 있다.
옷은 때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일상과 사회 속 관계를 매개하며, 또 다른 감각의 언어가 된다.
나는 메소 프로젝트를 위한 리서치중 그 가능성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 것은 한 권을 책을 만났다.
『Rethinking Fashion Globalization』 패션 세계화의 재고찰
『Rethinking Fashion Globalization』 (2023)은 Sarah Cheang, Erica de Greef, Yoko Takagi가 편집한 학술 앤솔로지로, 패션의 세계화를 서구 중심의 일방향 흐름으로 보기보다, 다양한 지역의 실천과 문화적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이 책의 10장, CHAPTER 10 CREATIVE COLLABORATIONS BETWEEN CONSUMERS AND FASHION DESIGNERS: THE ROLE OF FASHION POSTERS IN URBAN AND RURAL GHANA Malika KRAAMER and Osuanyi Quaicoo ESSEL 〈패션 디자이너와 착용자 간의 창의적 협업: 가나 도시 및 농촌 지역의 패션 포스터 역할〉 (Malika Kraamer & Osuanyi Quaicoo Essel)을 통해 ‘비스포크 Bespoke’라는 서양적인 단어에 비서양적인 (Non-Western)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가 알던 ‘비스포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
비스포크(bespoke)란 개인의 신체 치수와 기호에 맞춰 1:1로 제작되는 맞춤복을 뜻한다. 흔히 런던의 새빌로(Savile Row)를 떠올리게 되며, 고급 양복점과 정교한 재단, 값비싼 원단, 그리고 상류층 고객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실제로 영국식 비스포크는 수 세기 동안 특정 계층만을 위한 전통이자 권위의 상징으로 자리해 왔다.
하지만 가나의 비스포크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맞춤복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다.
지역 공동체 안에서 숨 쉬며,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사람과 옷을 연결하고 있다.
특히 볼타(Volta)와 센트럴(Central)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네 재봉사를 직접 찾아가 자신의 옷을 주문한다.
원하는 스타일을 패션 포스터에서 고르거나, 직접 천을 가져와 자신의 체형과 필요에 맞게 수정된 옷을 의뢰하는 방식이다.
가나의 비스포크는 스트릿웨어부터 오트 쿠튀르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고, 가격대 또한 다양해 지역 주민들의 접근성이 높다.
사용되는 원단은 켄테(Kente), 바틱(Batik), 왁스 프린트(Wax Print) 등 전통 직물이 주를 이루며 지역사회에서 제작된다.
즉 가나의 맞춤복은 단지 옷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지역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하나의 문화적 실천이다.
함께 하는 디자인 : Fashion Poster
가나의 비스포크 패션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패션 포스터의 사용 방식이었다.
지역의 크리에이터들은 가게 앞이나 골목 곳곳에 자신이 제작할 수 있는 스타일을 시각화한 포스터를 내건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들을 보며 자신의 옷을 상상하고, 조합하고, 직접 구성해 나간다.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과 취향은 이 포스터가 대신 전해준다. 디자이너와 착용자는 이미지 위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그 속에서 서로의 언어를 찾아간다.
SNS와 디지털 플랫폼이 일상이 된 지금도, 가나에서는 이 아날로그 방식이 여전히 가장 유효한 창작 수단으로 작동한다. 패션 디자이너 (제작자)들은 지역 시장에서 주기적으로 포스터를 사들인다. 새로운 디자인 아이디어를 보완하고, 기존 포스터들과 고객 취향을 조합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제안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취향 반영을 넘어선다. 제작자는 의뢰인의 몸과 움직임, 삶의 환경, 정체성까지 고려해 옷을 설계한다. 가나의 옷은 ‘입을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필요한 것만 만들기에 재고를 남기지 않고, 입을 사람의 니즈를 정확히 맞춘다.
옷은 단지 스타일이 아니라 정체성과 삶의 감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켄테나 바틱, 왁스 프린트 등 전통 원단을 제작하는 직조공과 염색 장인들,
이를 활용해 디자인을 창안하는 패션 디자이너,
디자인을 공유하고 주문을 수렴하는 아틀리에,
실제 옷을 제작하는 재봉사들,
포스터를 인쇄하고 유통하는 소규모 인쇄업체까지—
모두가 유기적인 순환 구조 안에서 연결된다.
이런 구조는 단순한 복식 제작을 넘어, 지역 기술력 향상, 공정한 가치 분배, 경제적 자립성으로 이어진다.
즉, 패션은 더 이상 외부에서 수입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작동하는 문화적, 경제적 구조가 된다.
새로운 비스포크
나는 가나의 비스포크 패션 문화를 보며 지금 우리가 가진 디지털 기술 환경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3D 바디 스캐너, 디지털 패턴 설계 툴, CLO 3D 같은 가상 샘플링 시스템은 이미 상용화되어 있고,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자신의 신체 데이터를 기반으로 신속하고 정밀하게 맞춤옷을 설계하고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현실은 아직도 대량생산 중심의 패션 시스템에 머물러 있으며, 우리는 대량 생산된 옷 속에서 자신을 끼워 맞추는 사람에 머물고 있다.
가나의 비스포크 시스템은 ‘관계’와 ‘사람’을 중심에 둔다.
그곳에서 옷은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 사람을 먼저 보고, 옷은 그에 맞춰 따라온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있다.
사람과 함께하는 옷
가나의 비스포크 패션 문화는 내 리서치의 핵심 질문에 다시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동시에, 패스트패션으로 인한 환경 파괴를 떠올리며, 2013년에 시작된 이 리서치와 현재 사이의 간극 또한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가나의 사례는 우리가 가진 기술과 자원을 ‘사람 중심의 맞춤복’을 위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을 위한 디자인’이란 결국 ‘사람과 함께하는 옷’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술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어야 한다.
비스포크는 더 이상 특정 계층만의 특권이 아닌, ‘필요한 옷만,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만드는 새로운 시스템이 될 수 있다.
결국, 옷은 ‘누구를 위해, 왜 만드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옷이 누군가의 삶과 깊이 연결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