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의 노벨상 대회에 참여한 후기
석사 Unit 2 Meso Project 에서 나는 그동안의 심도 깊은 리서치를 통해 현대 비스포크 시스템을 구현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 프로젝트는 맞춤 제작의 섬세함, 순환 자원의 활용, 그리고 기술 기반의 소통을 결합하여 '모던 비스포크'라는 새로운 생산 구조를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프로젝트의 최종 주제를 담당 튜터에게 설명했을 때, 그녀는 사회적 기업 (Social Enterprise) 모델로의 확장을 제안했다.
흥미롭게도 이 제안은 내가 영국으로 오기 전 국내에서 진행했던 예비 창업 프로젝트 '다다(Dada)'를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대학생들의 노벨상’, Hult Prize
바로 그 시기, 학교 뉴스레터에서 'Hult Prize'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생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Hult Prize는 전 세계 대학생들이 사회적, 환경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혁신적인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겨루는 국제 대회다.
유엔(UN)과 파트너십을 맺고 매년 UN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 연관된 주제를 선정하여 진행되며, 우승팀에게는 100만 달러(약 13억 원)의 상금이 주어지는 권위 있는 대회다. 예선을 거쳐 세계 결선까지 진출하게 되면 아이디어를 실제 사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멘토링과 글로벌 네트워킹 기회를 얻게 된다.
2023년 주제는 '순환 패션(Circular Fashion)'이었고, 2024년 주제는 ‘Unlimited’ 모든 SDGs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작년이었다면 완벽했겠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올해의 더 포괄적인 주제가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석사를 시작하며 패션이 환경과 사회에 어떻게 직결되는지를 보다 깊은 관점에서 탐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Hult Prize는 내가 연구하는 주제가 어떠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 실질적으로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MESO 프로젝트와 더불어 두 개의 파트타임 업무를 병행하고 있었기에,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거 예비 창업으로 진행했던 업사이클링 사회적 기업 '다다(DADA)'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되,
기존 방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소비 전 폐기 섬유물을 현대 비스포크 시스템에 도입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MESO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 비스포크 실험이 진행 중이었기에, Hult Prize 지원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었다.)
Hult Prize는 최소 같은 학교 재학생 네 명으로 팀을 구성해야 참여할 수 있었다.
이에 나는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대회 참여에 함께할 팀원을 모집하는 글을 올렸고, 그 결과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멤버가 모였다.
MA Fashion Futures 동기인 다경과 Nina, Sathivika, 그리고 패션 MD/바이어 경험이 있는 MSc Fashion Psychology의 Radhika가 그들이었다.
프로젝트 아이디어가 이미 상당 부분 구체화된 상태였기에, 나는 팀원들에게 그 핵심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나의 아이디어가 예상보다 복잡하고 어렵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의복을 제작하는 것을 넘어, 원단 소싱은 물론 사전 폐기 섬유(pre-consumer textile waste)를 활용한 디지털 소재 라이브러리 구축, 나아가 소비 후 폐기 섬유(post-consumer textile waste)와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한 폐기물 관리 방안에 이르기까지, 시스템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방대한 디테일들은 팀원들에게 버거운 과제였다.
이처럼 복잡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비즈니스 계획서, 4분 피치 영상, 최대 10장으로 제한된 비즈니스 덱(Deck) 등 간략한 제출 양식으로 짧은 시간 내에 완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각자의 강점을 활용해 이 난관을 헤쳐나갔다. 프로젝트의 핵심인 의류 제작 및 프로토타이핑은 MESO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주로 진행했지만, 팀원들이 각자의 강점으로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부분은 분명했다.
Nina는 최고기술책임자(CTO)로서 스타트업 창업 경험과 테크 디자이너 백그라운드를 가졌고, 기술 기획과 원활한 영어 소통에 기여했다. 다경은 피치 덱 디자인과 비디오 제작을, 최고재무책임자(CFO) 역할을 맡은 Radhika는 MD 바이어 경력을 바탕으로 재무와 소비자 관점에서 팀을 도왔다. 하지만 Sathivika는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렸던 탓에 석사 프로젝트와 Hult Prize를 병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최종 제출 전 충분한 대화를 거쳐 팀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 일을 통해 비슷한 출발점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경험과 역량 차이가 클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스턴 서밋을 향한 여정, 좌절과 기회의 교차점
Hult Prize 지원 후, 우리는 MESO 프로젝트 마감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잠시 잊고 있었던 Hult Prize에서 1차 합격 이메일을 받았을 때, 우리는 학교 대표로 선발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다양한 국가에서 서밋이 진행되는 가운데, 우리는 Hult Prize의 본고장인 보스턴으로 갈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Hult Prize는 참가 경비 지원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인도 국적의 Radhika는 비자를 받지 못해 결국 서밋에 동행할 수 없었다. 런던에서 보스턴까지 남은 네 명의 경비를 마련하는 것은 막막한 과제였다. 나는 튜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은 Global Pathway 펀딩을 신청할 것을 권고했다. Global Pathway는 학생들이 학업과 관련된 국제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보통 여행 경비나 참가비 등을 보조한다. 이미 마감일이 지났음에도 나의 사정을 길게 설명하는 이메일을 보냈고, 다행히 일부 금액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금액으로는 전원 경비를 충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때 나는 결정적인 돌파구를 보았다. 석사 과정 장학생으로서 초대받았던 UAL Scholar Event였다. 이 행사는 대학의 학문적 우수성을 기념하고, 교육과 학습에 헌신하는 교직원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자리였다. 평소라면 바쁜 일정 때문에 스킵했을 테지만, 학교 부총장이 연설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유일한 승산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여 망설임 없이 행사에 참석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나는 결연한 마음으로 인파를 뚫고 부총장 앞에 섰다. "혹시 Hult Prize를 아시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가 글로벌 결선에 진출했음을 설명하며 준비해 간 피치 자료와 부족한 펀딩 내역이 담긴 엑셀 파일을 보여드렸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축하한다"라고 말했고, 필요한 금액을 물은 뒤 자신의 이메일을 적어주었다. 그리고 일주일도 안되어 우리는 보스턴 서밋 참여를 위한 펀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보스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감사함과 뿌듯함을 함께 느꼈고,
이번 도전에 큰 성공을 이뤄내리라는 확신에 가득 찼다.
2024 HULT PRIZE 보스턴 서밋: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살면서 방문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보스턴, 헐트 프라이즈가 열리는 Hult 비즈니스 국제 학교는 세계 각국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한자리에 모인 거대한 축소판과 같았다.
각 팀은 자신들의 해법을 들고 무대에 섰고, 대기를 위한 비즈니스 회의실이 개별적으로 주어졌다.
네 명으로 시작했지만, 세 명이 된 우리는 남은 파트를 나누어 열심히 발표 대본을 외우고 또 외웠다.
함께했던 Nina는 리허설을 앞두고 특유의 여유로움을 보이며 'Take it easy'를 외치고서는
실제 발표 중 대본 일부를 잊어버렸다. 심사위원들은 엄격하게 4분의 발표 시간을 지켰고, 우리는 준비한 모든 내용을 전달하지 못했다.
발표의 아쉬움은 질의응답 시간으로 이어졌다.
4분간의 질의응답이 시작되자마자, 심사위원단의 첫 질문은 "비스포크(bespoke)와 사전 폐기 섬유(pre-consumer textile waste)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패션 전문가가 아닌 심사위원들이었기에, 우리가 아이디어의 핵심 개념으로 사용했던 용어들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을 마주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비스포크'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폭넓은 SDGs가 주제였기에 심사위원들이 패션 전문 용어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가 간과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결과는 탈락이었지만 그 결과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무대 밖에서 시작된 네트워킹은 오히려 더 큰 배움과 영감으로 다가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했고, 기후 위기, 식량 문제, 의료 접근성 등 다양한 사회·환경 문제를 다루는 전 세계의 혁신가들을 만나기도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비즈니스 확장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또한 DAY 2의 우승자를 보며 지속가능 개발 목표와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보다,
비즈니스의 재정적 지속가능성과 확장성, 수익성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것도 배웠다.
Second Chance Round 두 번째 기회
영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보스턴 서밋을 값진 경험으로 간직한 채, 곧바로 MESO 프로젝트 마감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다다’가 패자부활전 기회를 얻어 온라인 인터뷰에 초청된 것이다. 프로젝트 마감이 코앞이라 여건은 빠듯했지만, 런던에서 열릴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Radhika와 내가 준비를 사실상 전담해야 했기에 우리는 곧바로 밤샘 작업에 돌입했다. 보스턴에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자료를 전면 재구성하며, 단순한 정보 나열 대신 스토리텔링과 핵심 메시지, 그리고 설득력 있는 숫자에 집중했다. 특히 간결한 피치와 예상 질문에 대비한 Q&A에 심혈을 기울였다. 보스턴 서밋에서 만난 Hult 비즈니스 스쿨의 학생이자 자원봉사자였던 Katherine도 기꺼이 힘을 보태, 화상 통화를 통해 우리의 발표 자료를 검토해주었다.
보스턴 시간 기준 밤 12시에 시작된 온라인 인터뷰는 약 한 시간가량 이어졌고, 피칭과는 달리 면접관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긍정적인 피드백은 우리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은 컸지만, 패자부활전에 초청될 만큼 아이디어의 가능성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돌이켜보면 석사 최종 프로젝트 시작을 앞두고 한 달간 섬머 캠프에 참여해야 했던 상황에서 글로벌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고 Hult Prize 여정을 마무리 지은 것이, 최종 석사 프로젝트에 더욱 집중하여 완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트로피는 없지만, 더 많은 것을 얻다
Hult Prize를 통해 트로피는 얻지 못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귀중한 배움을 얻었다.
첫째, '비스포크(Bespoke)'라는 용어의 한계를 깨달았다. '비스포크'라는 개념이 서구권, 특히 영국이나 특정 문화권에서는 맞춤형 제작의 섬세함을 상징하지만, 비즈니스 영역이나 글로벌 무대에서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아이디어의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체감했다.
둘째, 글로벌 피치 시 간결함과 맥락 설명의 중요성을 배웠다. 우리는 아이디어의 모든 복잡한 디테일을 담으려 했지만, 심사위원들이 특정 분야 전문가가 아닐 경우 핵심 메시지는 물론 기본 용어조차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따라서 메시지는 보편적이고 간결하게, 그리고 청중의 배경지식에 맞춰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셋째, 패션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사회·환경 문제에 대해 배우고,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이들을 만났다. 보스턴 서밋에서 만난 전 세계 참가자들은 각기 다른 배경과 아이디어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기후 위기, 식량 문제, 의료 접근성 등 패션 외의 수많은 영역에서 영감을 얻었고, 그들의 진정성과 열정은 나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보스턴 경험은 MESO 프로젝트를 단순한 학업 과제를 넘어 사람과 지구를 잇는 사회적 기업 모델로 확장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진 혁신적인 아이디어라도, 그것을 지속가능하게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이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이때 비로소 깊이 배우게 되었다. 아이디어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속가능하게 실행하는 전략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