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게 만들어진 것들과 돌봄
이 글은 Tim Minshall의 『Your Life Is Manufactured』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패션 디자이너로서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소비해 온 ‘옷’을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
우리는 옷 속에서 살아간다. 원단은 거의 어떤 물질보다도 더 자주 우리의 피부에 닿는다. 우리는 옷을 입고 잠에서 깨어나고, 옷을 두른 채 도시를 걷고, 소속감과 반항, 부드러움과 힘을 표현한다.
옷은 패션의 일부이고 패션은 입을 수 있는 문화로, 기억이고, 정체성이며, 욕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옷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거의 알지 못한다.
What You Wear Is Manufactured
당신이 입은 것은 '제조'되었다.
실크 셔츠는 처음부터 ‘럭셔리’가 아니었다. 면 티셔츠는 처음부터 저렴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바랜 것처럼 보이는 데님 역시 저절로 그런 모습이 된 것이 아니다.
이 모든 옷은 원료, 섬유, 화학, 에너지, 노동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너무 복잡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생산이 보이지 않게 될수록, 책임 역시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다.
욕망과 생산 사이의 거리
300년 전만 해도, 당신은 누가 옷을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네에 재단사와 봉제사가 있었고, 실을 잣고 염색하고 직조하고 바느질하던 사람들 역시 공동체의 일부였다. 옷에는 지역의 기술과 손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 벌의 옷은 매장에 진열되기 전까지 다섯 개, 여섯 개의 국가를 거치고 수십 개의 하청업체와 여러 차례의 소유권 이전을 거친다. 인도에서 재배된 면화가 베트남에서 방적되고, 중국에서 직조되며, 다른 지역에서 염색되고, 또 다른 곳에서 봉제된 뒤 마무리, 운송, 마케팅,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착용자는 단 한 사람의 손도 보지 못한다.
이 과정은 더 낮은 비용, 더 빠른 주기, 더 높은 마진, 더 큰 규모를 위한 ‘최적화’의 결과다. 패션은 속도와 효율을 가시성보다 우선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 결과, 우리는 옷은 겉으로는 알지만, 그 옷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단순한 옷은 단순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장의 흰 티셔츠를 제작하기 위해 사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결정이 숨어 있다.
섬유는 무엇인가: 일반 면인가, 유기농 면인가? 관개 재배인가, 자연 강우에 의존했는가?
방적 방식은 어떤가: 오픈엔드인가, 링 스펀인가?
편직은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졌는가: 장력, 기계 속도, 실 끊김은 어땠는가?
염색은 어떤 방식인가: 반응성 염료, 염분 사용량, 폐수 처리는?
봉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봉제 구조, 실 선택, 노동 조건은?
마감은 어떤가: 효소 워싱, 실리콘 유연제, 열 세팅은?
모든 단계는 에너지를 소비하고, 폐기물을 만들며, 사회적 영향을 남긴다. 어느 하나도 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매장에서 이 모든 복잡성은 가격표의 숫자 하나로 압축된다. 최근 정책 논의에서는 섬유 산업의 환경·사회적 영향이 서로 단절된 생산 단계 전반에 분산되어 있으며, 이 구조적 불투명성이 책임 추적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 점점 더 명확히 인식되고 있다(European Parliament, 2024).
규모는 패션의 성격을 바꾼다
수작업으로 만든 옷과 대량 생산된 옷은 옷걸이 위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산업적 현실 속에 존재한다. 소규모 생산에서는 느림, 통제, 변주가 가능하다. 제작자는 손으로 조정하고, 실수는 드러나며, 재료는 쉽게 대체할 수 없기에 더 소중하다.
반면, 산업 규모에서 특히 패스트 패션은 ‘연속 흐름’을 만든다. 직물은 밤낮없이 돌아가고, 염색기는 쉽게 멈출 수 없다. 주문은 수개월 전 예측되었다가 매주 수정된다. 색상이나 소재 혼합을 바꾸는 일은 더 이상 창의적 결정이 아니라, 공장과 공급업체, 노동자에게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는 물류적 판단이 된다.
즉, 패스트 패션이 성장한 이유는 유연성이 착취 구조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Shein과 같은 브랜드는 빠르게 예측하고 반응하며, 그 리스크를 임시 노동, 초과 근무, 과잉 생산으로 흡수한다. 유행이 갑자기 끝나면, 남은 물량은 사라지지 않는다. 재고의류 (deadstock)가 되고, 할인 판매가 되거나, 수출되거나 소각 또는 매립이 된다.
이는 선형적 패션모델의 핵심적 실패로 지적되고 있으며, 팔리지 않은 의류는 시장에서는 사라질지 몰라도 환경적 영향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화려함 뒤에 숨겨진 패션의 취약성
패션은 유연하고 표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공급망은 매우 취약하다.
염색 공장의 홍수는 한 시즌 전체를 지연시킬 수 있고, 노동자 파업은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으며,
수요 급증은 공장을 위험한 초과 근무로 몰아넣고, 팬데믹은 판매를 멈춘 채 미지급 의류를 창고에 쌓아두게 만든다.
항공기 제조나 아이스크림 물류처럼, 패션 역시 타이밍과 조율, 통제할 수 없는 조건에 의존한다.
차이는 패션의 실패가 종종 ‘유행이 지나갔다’ 거나 ‘재고 이슈’라는 말로 포장된다는 점이다.
그 사이 인간과 환경의 비용은 조용히 다른 곳으로 전가된다. ICLEI & Circulars (2024)의 글로벌 섬유 산업 분석은 고도로 최적화되고 지리적으로 분산된 공급망이 가진 구조적 특성임을 보여준다
패션에서의 돌봄이란
제조를 이해한다고 해서 패션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패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옷이 단순한 스타일 선택이 아니라, 원자재의 채굴에서 섬유 생산과 노동, 화학 공정과 에너지 사용, 글로벌 물류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구조 위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 선택은 달라진다. 무지가 더 이상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돌봄은 덜 추상적이 되고, 선택은 이전보다 덜 가벼워진다. 패션의 영향을 고려한다는 것은 결국 ‘절제’를 요구한다.
외부로 피해를 전가하는 값싼 선택을 거부하는 것
속도에는 비용이 따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결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인정하는 것
내가 직접 겪지 않을 결과를 고려해 설계하는 것
이런 형태의 돌봄은 새로움과 욕망 위에 세워진 산업에서 자연스럽지 않다. 더 빨리 팔릴 ‘예스’ 대신 ‘노’를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조 혁신은 이 시스템을 다시 바꿀 수 있다.
제조는 현대 패션 시스템을 만들어왔고, 그 안에는 아름다움과 효율, 풍요가 있었다. 동시에 과잉과 불균형, 그리고 피해 역시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방식의 제조가 선택되는 가다.
그리고 제조 혁신은 이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순환성을 고려한 디자인 설계는 폐기물을 줄이면서 의복의 수명을 연장하고, 환경을 고려한 공정은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영향을 낮출 수 있다. 디지털 추적성은 생산과 소비가 단절된 지점에 책임의 구조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최근의 규제와 연구 프레임워크는 이러한 추적성을 소비를 도덕화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제품을 다시 현실에 연결하는 방법으로 바라보고 있다 (European Parliament, 2024).
가시성을 회복하기 위한 인프라
이러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더 넓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보이지 않게 분리된 생산과 소비의 구조 속에서, 책임은 어떻게 다시 드러날 수 있는가. 유럽연합의 에코디자인 규제 (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Regulation, ESPR)와 디지털 제품 여권 (Digital Product Passport, DPP)은 이 질문에 대한 제도적 시도다.
현대 패션에서 디지털 제품 여권(DPP)은 속도와 거리, 단절을 전제로 설계된 시스템 속에서 가시성을 회복시키는 인프라로 작동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옷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 책임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다시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옷은 원래 입고, 고치고, 기억되기 위해 존재해 왔다. 옷이 만들어진 방식을 기억할수록 그 옷과 함께 형성된 관계와 영향 역시 비로소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옷을 설계하는 대신 현재 CARE ID에서 디지털 제품 여권을 설계하고 있다. DPP를 단순히 규제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순환 패션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기반 구조로서 말이다.
참고문헌
European Parliament (2024) Digital product passport for the textile sector. European Parliamentary Research Service (EPRS).
European Parliament (2025) Fast fashion: EU laws for sustainable textile consumption. European Parliament.
ICLEI & Circulars (2024) EU–China Benchmark Baseline Study: Transition to Circular Economy in the Textile and Apparel Indu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