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삶에 들어왔다
나는 대중목욕탕을 좋아한다. 나이 먹을 만큼 먹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주거 공간에 욕조를 놓을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목욕탕은 내 피로를 가장 잘 씻어주는 요긴한 휴식처이자, 장년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을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처로서 내 일상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22년 코로나팬데믹이 수그러들고 마스크를 벗게 되면서 이제 다시 목욕탕에 가야지 하고 신이 나서 뛰어갔던 날, 내가 늘 다녔던 목욕탕이 건물째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의 충격을 뭐에 비교할 수 있을까? 속속들이 때를 미느라 쇠진한 기력으로 목욕탕을 나와 늘 밥을 먹던 1층의 식당을 포함해서 내 루틴의 일부가 깡그리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때 세상은 이제 코로나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코로나팬데믹이란 시대를 가르는 지표가 되었다.),
새로운 목욕탕을 찾기 시작했지만 적당한 곳이 없었고, 지하철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을 겨우 찾아 띄엄띄엄 다니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서 만난 할머니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가 목욕탕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우나이다. 한국의 목욕탕은 대개 사우나실을 두어 개씩 구비하고 있는데 나는 건(乾)실 혹은 황토방을 특히 좋아했다. (내가 오래 다녔던 목욕탕이 딱 이 두 개의 사우나실을 갖추고 있었다.) 새로 내가 찾은 목욕탕은 건실도 황토방도 없이 딱 하나의 사우나실을 갖고 있는데, 그것도 감지덕지라 불만 없이 들어간다. 셋이 나란히 앉으면 적당하고 넷이 앉으면 눈치껏 얼른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법한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내가 혼자 그 안에 앉아 있을 때 한 할머니가 들어오시려다가 사우나실의 문을 밀었다. 그런데 문이 무거운지 끙끙대고 계시길래 일어나서 열어드렸다. 문은 사실 무겁지 않아서 어깨로 밀어도 열릴 정도였지만 할머니의 힘에는 부쳤던 것이다.
할머니가 내 옆에 앉았다. 평소 나는 사우나에서 귀만 열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그렇게 사소한 친절에 너무나 고마워하시는 할머니와 이러쿵저러쿵 말을 주고받았다. 흐릿한 맨눈으로 봐서 그녀는 70대 후반에서 80대 중반 사이의 어디쯤 되는 것 같았고, “곱게 늙었다”는 말이 딱 알맞은 외양과 태도였다.
할머니 : 할머니들은 화장을 곱게 해.
나 : 진짜요? 하는 것도 일이지만 지우는 것도 일인데 왜요?
할머니 : 치매예방이 된대. 순서대로 해야 제대로 칠하니까. 여기(눈)에 빨간 칠 하면 안 되니까. 매일 순서 외우면서.
나 : 아...
나이 먹으면서 로션 바르는 것도 귀찮아지는 나였지만, 치,매,예,방, 이 한마디로 한순간에 납득이 되었다. 어쩌면 지금 노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전쟁도 계엄도 뭣도 아니고 치매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예방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겠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뻐지기 위한 화장이 아니라 매일 순서를 외우고 매일 치매예방을 하기 위한 화장을 한다. 마음에 콕 와서 박혔다. 오래 전 30대가 되어도 결혼을 하지 않던 두 여자가 명절에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다 이후로도 혼자 살아갈 것이 의지미래와 단순미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훤히 보이는 여자들이었다. 늙어서 중풍(당시 용어가 이랬다.)과 치매 중 하나가 걸린다면 어느 것이 더 나을까? 몇 시간을 토론하다가 내린 결론은 둘 중에 어느 하나도 절대 안 된다, 였다. 절대!!! 할머니는 나의 미래였고 화장하는 할머니의 마음 또한 나의 미래가 될 것이다.
할머니 : 나이를 먹으니까 움직이기가 힘들어.
나 : 그렇죠.
할머니 : 가장 실감날 때가, 버스에 올라타면 제일 앞자리에 앉은 이가 벌떡 일어나.
나 : 양보하는 거니까 좋잖아요.
할머니 : 너무 빨리 벌떡 일어나서 좀 그래.
나 : 후후.
할머니 : 그래도 양보해줘서 고맙긴 해.
나 : 하하.
나는 그때 할머니가 젊어서는 양보라든가 배려라든가 하는 이름의 허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몸과 마음을 의탁해야 하는 치매가 더 꺼려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양보와 배려를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상황, 바로 나이 먹으면 맞닥뜨리는 상황이다. 나이를 먹는 일이란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것들을 고맙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자글자글한 주름이나 꺼지지 않는 뱃살처럼. 처음에는 당혹스럽지만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자기 주문을 걸며 수용해야 하는, 평생 독립적인 가치를 우선으로 삼고 살다가도 주변의 돌봄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그것에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대화가 더 이어졌다
할머니 : oo역 부근에 XX사우나라고 알아?
나 : 몰라요
할 : 거기가 무지 좋대. 65살 이상은 할인도 해준대. 죄다 거기로 간대.
나 : 우와
할 : 그래도 나는 여기가 안 없어졌으면 좋겠어. 큰 데보다 여기가 소박해서 좋아.
나 : 저도요.
문득 목욕탕에 같이 가자고 조르던 내 십대 시절의 엄마가 생각났다. 그 당시는 목욕탕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발가벗은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살색 풍경이 싫었다. 지금 할머니와 사우나에 나란히 앉아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엄마가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철들었네.” 이럴까?
결론은, 대중목욕탕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