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삶에 들어왔다
미국에 사는 친구가 서울에 왔다. 만나서 막국수와 감자전을 먹은 다음 날 그녀는 손으로 찢어버린 종이들이 수북한 사진 한 장과 함께 나에게 이런 톡을 보냈다. “통장도 다 찢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수많은 차용 메모와 통장과 영수증과 각서, 그리고 끝내 받지 못한 채권을 남기고 돌아가셨고, 분명 자기 돈인데 딸에게 남겨주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여기며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억울해했다. 채무자들이 다 지인들이었으므로 친구는 혹시나 늦게라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버리지 못하던 엄마의 유품을 그렇게 버렸다.
나는 친구의 마음이 가벼워지기를 바라면서 얼마 전 읽은 책의 한 구절을 보냈다.
"시어머니, 왜 그때그때 버리지 않으셨어요."
오래전 내 엄마의 유품 정리를 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발견한 엄마의 신혼 시절의 메모에 충격을 받았고, 그 후 내 삶의 기조가 사뭇 변했다. 이것은 따로 이야기해야 할 만한 내용이라 여기서는 간단히만 말하고 싶다. 대신 다른 유품 이야기를 하자면, 엄마는 내가 선물한 모자를 포장 박스째 고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나는 “이 아줌마가 진짜...” 하면서 슬퍼졌다. 암환자였던 엄마는 머리가 죄다 빠져서 늘 모자를 썼는데, 거의 무채색의 미용실 모자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봄나들이 갈 때 쓸만한 샤랄라 모자를 선물로 주면서 병 다 낫고 이거 쓰고 놀러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도 그랬지만 엄마도 그 모자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그 모자는 그대로 박스 속에서 주인을 잃었고 나에게 후회를 남겼다.
유품이란 죽은 자와 남은 자가 관계를 정리하는 마지막 의식 같은 것이다. 그것을 하면서 없던 이해가 생기거나 있던 오해가 없어지거나 할 수 있다. 그리고 가는 자가 남는 자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같은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 영화 <마지막 레슨(2014, 파스칼 포자도 감독)>은 존엄사를 강행하는 할머니가 강력하게 반대하던 아들은 물론이고 조력해준 딸과 마음의 지지를 해준 손자까지, 모두의 이름표를 달아 각자에게 적합한 유품을 하나씩 남긴 장면이 있다. 영화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씬이었는데, 이것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선물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무실 이사가 결정되어 이삿짐을 쌌다. 나는 평소 짐을 잘 안 버리는 편인데 이사를 할 때 왕창 버리고 떠난다. 그래서 잘 안 버리는 사람치고 짐이 많지 않다. 이번에도 가져갈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해가며 짐정리를 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사와 죽음이 비슷하다고, 남길 것과 버릴 것을 잘 구분해서 정리해야 한다고, 가장 중요하게는 둘 다 ‘미리’ 해야 한다고. 그래야 남기는 물건(유품)들이 깔끔하고 적당한 선물이 된다. 버릴 것도 남겨 놓는 패착은 남는 자들을 힘들게 할 뿐이고.
내 친구는 돈을 받아내는 과정의 스트레스와 불확실한 결말 대신 평온함과 확실한 결말을 택했다. 친구는 엄마에게 이런 말을 건넬 지도 모른다. “엄마, 진즉 엄마도 이런 것에서 놓여났다면 편한 노년을 살 수 있었을 텐데요.” 물론 친구도 어머니도 그 돈이 없어서 굶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나도 죽기 전에 꼭 이뤄야 할 일 따위 없다. 죽을 날이 멀었다고 미루다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부터 남길 것과 버릴 것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하고 구분하고 버리고 남겨야겠다. 나라는 인간을 깔끔하게 기억하도록. 죽음이란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사 가는 것과 같으므로 이삿짐 싸듯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