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죽음이 삶에 들어왔다

by 노리

요즘 인터넷 게시판에서 재미난 표현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프로야구 경기에서 엄청난 호수비를 보여준 상대팀 야수에게 “미친 거야?(P)”라고 하는 것이 그렇다. 미쳤냐는 표현이 절대 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호수비를 극찬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의미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아마도 게시판에 글자로만 써서는 오해가 생길까 봐 굳이 이런 맥락 의미를 부연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얼핏 들으면 부정적인 표현이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참 많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변곡점은 40살이 넘으면서 강렬하게 찾아왔다. 내가 늙어간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그때는 ‘늙는다’는 표현보다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이 어울렸겠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늙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것은 마치 스물아홉 살 시절, 서른이 되면 뭔가 큰일이 날 것처럼 구는 친구들의 호들갑이 싫어서 미리 “나는 삼십대”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던 것과 마찬가지 심리였다.


40대 후반의 어느 날, 오랜만에 50대가 된 선배들을 만났다. 나는 부쩍 체감되는 내 심신의 변화를 읊으면서 이 모든 것에 늙어서라는 핑계를 댔다. 늙어서 술이 잘 안 깨요, 늙어서 건망증이 심해졌어요, 늙어서 자막이 잘 안 보여요, 늙어서 오래 못 앉아있겠어요, 어쩌구 저쩌구.


“자꾸 늙었다고 말하지 마.”

원래도 느릿한 말투였던 선배가 더욱 느리게 – 또박또박 - 말했다.

“제가 지금 늙었다고 하는 게 부정적으로 말하는 거 아니에요. 가치중립적인 의미로, 그러니까 그냥 나이를 먹었다, 그런 의미로요.”

“그래도 늙었다고 하면 뒷방 늙은이가 된 것 같아서 싫어.”


아, 뒷방 늙은이... 그 말을 듣고 나는 늙었다는 말을 멈추기로 했다. ‘늙음’의 사회적 뉘앙스가 부정적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늙은이가 되어간다는 것에 부정적인 덧칠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얼마 전 재미난 책 제목을 발견했다.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노부토모 나오코 지음) 엄마의 치매 진단 전후를 딸이 기록하듯 적어간 것인데, 다큐멘터리영화로 제작되어 큰 반향을 얻자 영상에 담지 못한 에피소드들을 추가해서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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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치매라고 할 때는 매우 진전된 상태라서 거의 의식이 없는 중증을 흔히 떠올리자만, 내 나이쯤 되고 나니 초기 치매에 관심이 생긴다. 그런데 치매란 것이 완치가 없는 병이고 초기든 중증이든 마치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처럼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 병명이다. 마치 2,30여 년 전에 암이라고 하면 곧 죽겠구나 싶은 공포가 지배했던 것처럼. 만일 나에게 알콜성 치매와 노인성 치매가 합쳐져서 앞으로 빠르게 중증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절망에 휩싸일 것이다. “난 끝났다.”


‘늙음’과 ‘병’은 얄밉게도 궁합이 잘 맞는 친구처럼 붙어 다닌다. 내가 아무리 건강 체질로 태어나 병원비와 약값을 쓰지 않고 살아왔다 해도, 앞으로는 여기저기 부실해진 몸을 때워 가며 살아야 한다. 되는 대로 막 살아도 건강했기 때문에 몸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더 병에 대한 불안이 생긴다. 어떡하지? 나는 왜 늙는다는 일이 이렇게 불안하고 싫을까? 내가 “가치중립적으로” 늙었다고 떠들고 다닐 때는 사실 진짜 늙는다는 것을 모를 때였다.


책 제목은 작가의 어머니가 한 말이라고 한다. 마치 “치매(P)”라고 붙여놓은 것처럼 굳은 마음가짐이 느껴졌다. 특히 잘 부탁한다는 말이 노인성 병은 돌봄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지지대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내가 늙어서 새로 갖춰야 할 마음가짐이다.


늙었으니 잘 부탁합니다.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병자라서 잘 부탁합니다.

아직 큰 병 없고 치매 아니지만 미리 미리 “부탁합니다”를 연습해 본다. 죽을 때까지 늙음(P), 치매(P), 병자(P)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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