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경 Feb 06. 2020

이제 곧 생리를 시작할 딸에게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여자아이의 왕국'

수많은 그림책을 읽는 동안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때 이 글을 씁니다. 이번 글은 엄마의 이름으로 열네 살 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 기자말


"이제 곧 생리를 하겠네요."


2020년을 이틀 앞두고 사람 인두유종 바이러스 예방접종을 하러 보건소에 간 날이었지. 미리 적어 낸 문진표를 확인하고 진료를 끝낸 의사가 예언하듯 말했어. 그리고 내게 물었지.


"생리를 하게 되면 생리통이 있을 수 있어요. 그건 대부분 엄마를 닮는데 엄마는 어땠어요?"

"요즘은 좀 심할 때가 있는데, 생리통이 심한 편은 아니었어요."

"그렇군요. 생리통이 심하면 진통제를 먹으면 됩니다. 괜찮아요."


보건소 의사는 의사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긴 시간 동안 곧 있을 너의 신체 변화에 대해 하나하나 알려주었어. 이번 접종의 목적과 부작용 등에서 대해서도. 6개월 후에 와서 꼭 2차 접종을 맞으라는 말을 듣고 보건소를 나왔을 때 엄마는 이 그림책이 생각났어. 언젠가 너에게 읽어주고 싶었던 '여자 아이의 왕국'이란다.



엄마가 언제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작가에 대해 말한 적 있었나? 폴란드 출신 이 작가는 폴란드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유명할 정도로 많은 그림책을 냈다고 해. 그분의 그림책은 하나같이 다 인상적인데, 이 그림책은 특히 그랬어. 아마도 작가 개인의 경험이 담긴 내용이라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


작가는 실제 열 살 즈음에 생리를 했대. 그래서 생리가 반갑고 좋기보다는 좀 어렵고 힘든 기간을 보냈다고 해. 그런데 막상 생리를 하지 않게 되는 시기가 오자(그걸 폐경이라고 하는데), 생리에 대해 어떤 그리움이 생겨서 이 그림책을 쓰게 되었다는구나.


표지부터 좀 낯설지? 그림도 아닌 것이 이게 대체 뭘 표현한 거람? 이런 생각이 들 것도 같아. 엄마도 그랬거든. 궁금하니까 빨리 책장을 넘겨 내용을 확인해 보자. 그런데 진아, 이 책은 빨리빨리 넘길 수 있는 그림책은 아닌 것 같아. 페이지마다 작가가 숨겨놓은 상징들이 많아서야.


한눈에 봐도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아이가 방바닥에 누워 있어. 세상 다 귀찮다는 듯 눈을 꼭 감고 말이야. '여자아이가 살다 보면 변화를 느끼게 되는 날이 옵니다'라고 하는데, 오늘이 그날인가 봐. "공주야, 오늘 너는 여자가 된 거야"라고 하는 걸 보니, 아마도 이 아이가 초경을 시작한 것 같아. 그런데 보이니? 흰 레이스 천을 휘감고 있는 여자아이 아래 빨간색 실 말이야. 이건 뭘까?


궁금한 건 또 있어. 아빠인 것 같은 남자가(손에 결혼반지 끼고 있는 거 보이지?) 방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건네는 화분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은 바로 이렇게 그림 속 의미를 찾아가며 읽는 재미가 있어. '아! 그렇구나' 알게 되는 것도 있고, '에계 뭐야?' 소리가 나오는 시시한 것도 있고, 의미가 뭔지도 모르고 지나가게 되는 상징도 있지. 그러다 보니 내가 발견하지 못한 건 없는지 점점 더 궁금해지게 만든다니까. 뭐에 대해 그렇게 의미를 꽁꽁 숨겨놓았냐고? 그건 바로 생리에 대해서야.


작가는 말해. 여자아이는 초경을 한 날부터 한 달에 한번 빠짐없이 '자기 왕국의 주인이 된다'라고. 그런데 처음엔 이 왕국이 마냥 좋지만은 않아. 앉아야 할 왕좌는 불편하고, 너무 길어 질질 끌리다가 엉키는 베일을 쓴 것만 같지. 저주받아 개구리가 된 공주처럼 여겨지고, 그때가 되면 완두콩 한 알에도 신경이 곤두서. 독사과를 먹은 공주처럼 아프고, 탑에 갇힌 공주처럼 외롭기도 하고, 또 졸리기도 해. 그런데 문제는 이 왕국에서 벗어나는 게 거의 불가능 하단 거야(물론 경우에 따라, 생리 중단을 선택하는 여성들도 있지만). 여자아이가 생리를 하게 되면서 겪는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왕국'에 빗대어 풀어내다니, 정말 놀랍지 않니?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야. 몇 년이 지나자 여자아이는 서서히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는 법을 알게 돼. 불편한 왕좌에는 부드러운 방석을 놓고, 베일을 엉키지 않도록 쓰는 것에도 익숙해지지. 또 가끔은 완두콩 한 알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아. 시간이 갈수록 점점 여자아이는 자신의 왕국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자랑스럽게 여기게 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걸 알게 되지. 바로 자신이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여왕이라는 걸 말이야. 머리에 화관을 쓰고, 말을 타고 문 밖으로 나가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참 당당해 보여.


어때? 생리를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니? 물론 이미 생리를 시작한 친구들에게 더 자세히 들었겠지만. 생각해보면 엄마는 생리를 부끄럽게 여기고, 생리를 생리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했던 것 같아. "나 생리해"라는 말보다 "그날이야"라는 말을 훨씬 많이 했거든. 갑자기 생리를 시작해서 친구에서 생리대를 빌릴 때도 그런 첩보 작전이 따로 없었어. 어떻게든 눈에 안 띄게 생리대를 건네받으려고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어. 그렇게까지 숨길 일이 아닌데 말이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데.


너에게 처음 생리라는 말을 했을 때도 그랬어. 너는 몰랐겠지만, 입으로 "생리 생리 생리..."를 얼마나 연습했는지 몰라. 어느 정도 생리란 말이 입에 붙고 나서야 너에게 생리에 대해 말할 수 있었지. 그랬더니 아홉 살이었던 동생 윤이에게는 조기 교육이 되었지 뭐야. "엄마 생리해?"라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니. 그렇게 되니 나도 더 이상 생리를 말하는 게 어색하고 불편하지 않게 되었어. 그리고 알게 됐지. 성교육은 빠를 수록 좋다는 걸 말이야. 또 성에 대해 어떤 편견도 생기지 않았을 때, 그때가 성교육하기 딱 좋은 때라는 것도.


진아, 엄마가 생각하는 생리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잘 돌봐야 하는 신호'인 것 같아. 네가 그 신호를 무시하지 말고 잘 들었으면 좋겠어. 생리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폐경을 할 때까지 한 달에 한 번, 보통 28일~30일 주기로 찾아오는데 우리 몸은 그전에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많거든. 그림책에서 봤듯 몸이 아플 때도 있고, 심리적으로 힘들 때도 있어. 네가 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잘 수신해서 받아들이면 적응하기까지 그 몇 년이 아주 고통스럽지는 않을 거야.


마지막으로 진아. 작가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줬듯 엄마도 네가 당당한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 여자아이 왕국에서 여왕이 되는 것, 너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훌쩍 커버린 게 아쉽기도 하지만, 한 여성으로 커가는 너에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어 참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