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편집기자. 대학 시절 교내 신문사에서 3년간 학교 신문을 만들었다. 학생기자로 활동한 경험이 지금의 일로 이어졌다고 믿는다. -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소개 일부
저자 소개로 이 세 문장을 적는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난 12월 11일은 신문사 선배의 기일이기도 했다. 내가 선배라고 부르는 이는 96학번 K. 대학교 1학년 수습기자였던 나에게 취재하는 법, 기사 쓰는 법을 가르쳐준 선배다. 한 학번 차이나는 선배와 나는 1년이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했다. 선배 자취방에 화재가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고등학교 3년 동안 나는 매일 오전 6시 반에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면 정확히 그 시간에 봉고차가 왔다. 봉고차는 13명 남짓한 아이들을 군포에서 안양 끝 구석에 있는 학교까지 실어 날랐다. 학교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밤 10시까지 나올 수 없었다. 교사의 감시 하에 매일 야간 자율학습이 있었다.
도시락을 2개씩 싸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주말에도 학교 교실에서 공부를 하거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다. 고3 때는 밤 11시까지 학교에 있는 시간이 1시간 더 연장되었다. 그렇게 오래, 많이 지겹도록 공부만 했는데, 내가 받은 내신 성적은 공부만 한 게 맞는지 의심되는 수준이었다. 그 내신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그 사실이 그다지 슬프진 않았다.
대신 나는 수능에 올인했다. 그래도 기자를 꿈꾸었던 내가 갈 수 있는 신문방송학과는 없.었.다. 결국 성적에 맞춰 대학과 전공을 선택했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 3월 캠퍼스에서 내가 운명적으로 발견한 게 바로 이 포스터였다. OO대학 OO신문사 수습기자 모집. 여길 들어가면 신문방송학과에 굳이 안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홀린 듯 수습기자가 되었다. 1학년 1학기 수습기자 생활을 보냈다. 여름방학에는 농활을 갔고 신고식을 마친 뒤 사회부 정기자가 되었다. 학생기자가 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선배에게 따지고 들었던 내가 어느새 누가 가라고 하지 않아도 여기저기 사회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그해 겨울 종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가 떠났다. 밤새도록 눈이 내려 무릎까지 쌓이던 그 아름다운 밤에 갑자기 우리를 떠났다.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슬픔이 바로 어제 일같다. 선배는 가도 신문사에 남은 사람들은 매주 신문을 만들었다. 월요일이면 기획회의를 하고, 금요일이면 학교 신문사에 남아 밤새 기사 마감을 했다.
포털에 '수습기자'를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
동기들은 중간에 그만 두거나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다 퇴임했다(우리 학교 신문사는 5학기제다). 휴학을 하거나, 유학을 가거나 이제부터라도 학점을 관리해서 취업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더 남아서 신문을 만들고 싶었다. 남아 있는 후배들 상황이 좋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더 1, 2학년 후배들과 신문을 만들고 퇴임했다.
편집장을 하던 마지막 6학기 시절에는 수습기자들과 정기자들 기사 봐주고, 내가 써야 할 기사를 쓰고 그렇게 기사 마감이 끝나면 디자이너 선배들에게 기사를 넘긴 뒤 옆에서 편집을 도왔다. 문장이 넘치면 줄이고, 문단이 부족하면 어떻게든 채워 넣고, 제목이 길면 줄이고, 부족하면 늘였다. 사진과 일러스트를 챙겼다. 그렇게 마감이 끝나면 토요일 오전에 주간교수의 최종 오케이를 받았다.
수정할 게 생겨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을 하다 보면 어느새 토요일 저녁. 빨리 한다고 하는데도 늘 시간에 허덕였다. 학교 가까운 출력소에 가서 필름을 뽑은 뒤 필름 교정까지 확인하면 내 일은 거기에서 끝났다. 다음날은 죽은 듯 자고 일어나 다시 월요일 기획회의를 준비했다.
그런 내가 학생기자를 퇴임하고 보니 기사를 쓸 데가 없었다. 아, 더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싶은데... 어디에서 글을 써야 하나 싶을 때 만난 매체가 바로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었다. '와... 여기라면 내가 글을 쓸 수 있겠구나.' 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 22분 창간한 이 온라인 신문에 나는 3월 13일 시민기자 회원으로 가입해서 글을 썼다. 전공에 뜻이 없던 나는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이른 취업에 나서 직장인이 되었다. 2001년 졸업 이후 내 일을 하면서도 때론 시민기자가 되어 내가 쓴 글이 기사로 채택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2003년 취재기자가 아닌 편집기자로 입사했다. 내가 '학생기자로 활동한 경험이 지금의 일로 이어졌다고 믿는다'라고 쓴 건, 이것만큼 정확하게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 없기 때문이다. 편집기자의 일의 '편'자도 모른 채 일을 시작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학생기자로 활동했던 3년은 편집기자로 사는데 필요한 밭을 착실하게 가꾼 시간이 되어 주었다.
- K 선배를 기억하는 사람 몇몇이 현직 학생기자들에게 기리는 마음을 모아 매년 '모범기자상'이라는 이름으로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때문에 오랜만에 편집장 후배와 통화하는데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남아 있는 후배들이 별로 없다고 했다. 힘들지 않을 때가 없는 게 신문사 생활이라는 걸 너무 잘 알지만 뭐가 좋은지 계속 웃는 편집장의 목소리가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부디 어려움을 잘 이겨내길. 물론 그렇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