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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경 May 08. 2024

출근길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나

[나의 안식월 이야기] 안식월에는 몰랐던 것

6시 알람. 한 번에 일어나는 것은 어쩐지 인간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잤다. 6시 50분. 미루지 않고 한 번에 일어났다. 파다닥. 애들 아침은 뭘 주지...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참외를 이쁘게 깎고 방울토마토 그리고 빵. "얘들아, 아침 먹어." 식탁에 챙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오전 7시 10분. 하늘이 맑다. 어제랑 공기가 다르다. 차갑다. 대신 빛은 따뜻하다. 아침이지만 햇빛에 벌써 질려버린 담쟁이를 제일 먼저 만났다. 너는 오늘 일진이 별로구나.


축 처진 담쟁이 잎들.


오늘의 산책 코스. 축축한 습기로 가득했던 어제의 길이 뽀송한 공간으로 탈바꿈. 책에서 읽은 표현인데 나무는 내리쬐는 햇볕을 '꿀꺽 삼켜 먹고' 있었다. 같은 길인데 하루 만에 이렇게 다른 느낌이라니. 자연은 하루도 한시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핀 조명처럼 햇살이 때려 박힌 듯한 나무에 저절로 시선이 간다. 밝은 기운. 내 마음도 함께 밝아진다.


누가 여기 핀 조명 흘리고 갔나요
내리쬐는 햇볕을 '꿀꺽 삼켜 먹고' 있는 나무들


빛이 침범해 들어오는 공간이 좋다. 담벼락에 일렁이는 그림자마저 예술처럼 보이는 오늘. 어제의 장면을 오늘의 모습으로 다시 카메라에 담는다. 변화에 놀라면서도 반갑다. 고작 하루 만인데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햇빛에 질려버린 담쟁이가 있는가 하면 잔뜩 물오른 담쟁이도 있다. 그 안에 내가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다. 프레임에 담긴 내 모습이 재밌어서 한 컷 더 찍는다. 음, 그래... 자연스러웠어. 산책을 이어가다가 발견한 심쿵한 하트 모양 꽃잎. 그냥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와서 카메라에 담는다. 이런 건 찍어야 해. 그냥 가면 꼭 후회한다니까.



책 <내 속에는 나무가 자란다>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왜 나뭇잎에는 하트 모양이 이리 많을까... (중략) 빈랑나무 잎부터 라즈베리에 이르는 수많은 하트 잎사귀를 볼 때마다 마치 내 가슴속에 있는 심장을 보는 것 같다. 호두가 왜 인간의 두뇌와 닮았는지, 콩은 신장, 오크라가 왜 손가락 모양으로 생겼는지 알 방법은 없다. 증명할 수는 없어도 분명 관계는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독일 기독교 신비주의자 야코프 뵈메는 이런 모양과 형태의 유사성에서 신의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내 심장과 뇌와 신장이 이미 식물과 비슷하게 생겼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 문장 덕분에 이 순간이 더 멋있게 느껴졌다. 내 심장을 닮은 꽃잎이라니. 그러다가 동화 속 한 장면을 만났다. 이른 아침인데 교복을 입은 아이.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학교에 왔을까. 누굴 기다리는 걸까. 멀리서 한동안 아이를 지켜보았으나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바랐다. 그래도 괜찮았길. 너무 속상해하지 않길. 결국엔 친구와 반갑게 길.


안식월에 전혀 몰랐다. 늦게 일어났고 애들 아침 먹고 학교로 떠나면 또 잤으니까. 내게 쉰다는 것은 늦게까지 자도 된다는 뜻이었으므로. 안식월에 '새벽 7시에 일어나 산책 해야지' 하는 마음은 1분, 1초 한순간도 하지 않았다. 복귀하고 알게 되었다. 때론 부지런해야 보이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또 있다. 20여 년 동안 꿈꾸던 직주근접(직장과 주거지가 가까운 것)을 드디어 이뤘다는 것. 25분을 걸어 회사(=다시 집)에 도착했다. 재택 4년 차인데 나갔다 들어오는 걸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늘 마음뿐이었다. 그저 한번 나갔다 들어왔을 뿐인데 장거리 출퇴근러의 소원이 이뤄지다니.


아쉽다. 작심삼일이 예정되어 있다. 내일은 회의가 있어 진짜 사무실로 가기 때문이다. 왕복 3시간의 광화문 여정. 내 초록이들, 잠깐만 안녕.


- 생각해 보니 어제 하루 종일 모니터를 봤는데도 눈이 아프지가 않았다. 초록의 힘이었을까. 오늘로 이틀째. 눈이 아프지 않았다. 초록의 힘이었다(고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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