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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경 Jun 09. 2024

글로 만난 사이, 참 신기합니다

[나의 안식월 이야기] 독서모임 멤버들과 우면산 산책

"너무 좋아요... 여기를 어떻게 오시게 된 거예요?"


여길 언제 와 봤더라. 예술의 전당에서 대학 선배 앨리를 만났을 때였다. 산책을 하고 싶어서 예술의 전당 뒤쪽으로 난 길을 향해 걸었다. 몰랐는데 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었다. 우면산이라고 했다. 숲을 향해 더 걷고 싶었다. 문제는 우리 둘 다 초행길이었다는 것. 산길을 이렇게 무작정 가도 되려나?


앨리는 워낙 길치였고(20대 시절 앨리와 나는 유럽에서 만나 독일과 체코를 2주간 여행한 적 있었는데, 앨리는 산책하러 나갔다가 숙소를 찾지 못해 당황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나는 길눈이 밝은 편이었다. 앨리는 길에 대해서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믿을 것은 나뿐. 길을 찾아내는 나의 직감뿐이었다. 크게 걱정하지 않고 걸었다. 길은 있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가을에 만나고 봄. 1년에 두 번 이상 만나면 절친 아닌가요?


다행히 '여기가 어딘가' 싶을 때마다 친절하게 표지판이 나타나 주었다. 그렇게 앨리와 나는 나의 본능과 표지판을 의존해서 산을 타고 양재천까지 걸어 내려올 수 있었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던가.


"그때 그냥 한번 가볼까? 하고 갔던 길인데 너무 좋아서 한번 더 오고 싶었어요."

"5년 전이요? 와 대단해요. 어떻게 그냥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난 엄두가 안 나는데..."

"길 찾는 거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수리산도 늘 다니던 길로 가지 않는 걸 보면. 계속 다른 길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거든요. 그때그때 코스를 바꾸는 게 새롭고 재밌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정말 다양한 길이 있더라고요."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그냥 한번 가볼까' 하고 가보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는 걸. 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있는데, 한번 해보지 뭐, 싶을 때가 더 많았다는 걸. 하지 않았을 때 '할 걸' 후회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웬만하면 한번 해본다.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모. 뭐가 되었든 해봤으니까 되었다 싶은 기분이 좋다. 만족스럽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아나'라는 말이 있는데 굳이 분류하자만 나는 먹어봐야 아는 사람 쪽에 가깝다.


그 덕에 봄이면 좋은 사람들과 찾아갈 우면산 코스도 개발하지 않았나. 이날 멤버는 나와 지난 1년간 한 달에 한번 줌(zoom)으로 독서모임을 한 사람들. 사춘기 아이를 키우면서 드는 고민을 책을 읽으면서 함께 나누고 싶었다. '질문하는 엄마들'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냥 그때그때 관심 있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된 데는 사춘기 무렵의 육아는 뭔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공부는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깨달아야 한다. 문제는 그 깨닫는 순간이 언제일지 좀처럼 예측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걸 좀 당겨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것에 내가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독서모임의 시작은 아이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 그러려면 뭔가를 알아야 한다는 어떤 간절함이 있었는데,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의 고민을 말할수록 '그래서, 질문하고 고민하면 바뀌나... 문제 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건 내가 아닌 아이인데?' 하는 피로감이 있었다. 이런 감정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내심 내가 고민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아이가 바뀔 거라고 기대했나 보다. 아니었다. 아이는 그대로 한결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넌 왜 그러니?' 따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다시 아이 탓을 하게 되었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안 해 보던 거 해보는 시간. ^^ 한참 웃었네요. 저는 누구일까요?


그런 저런 이유로... 멤버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시작한 모임, 1주년을 마지막으로 끝내자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쉽긴 했다. 책 읽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아이 이야기로 합이 잘 맞는 모임이 주변에 없어서 그랬는지 이 든든한 동지들과 헤어지긴 싫었다. 그래서 말을 못 하고 있었는데... 이거 아니네... 라는 생각을 나만 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책을 덮고 자연으로 가자, 해서 나의 안식월을 핑계로 평일 오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독서모임 멤버들을 만났다. 산에서 마시는 아이스아메리카노는 꿀맛이므로 테라로사에서 텀블러에 각자의 커피를 담아 출발. 글로 만난 사이들이라 그런지 오랜만의 만남에도 어색함은 1도 없다. 많이 웃고 이야기했다. 글 쓰는 사람이자, 엄마이자, 여성으로, 나로 사는 그런 이야기들이 부챗살처럼 펴졌다 접혔다 그랬다.


산행 후 딱 한 잔. 이건 국룰이죠.


아닌 아니라 글로 만난 사이는 이상하게 친근하다. 글을 읽으면서 사람을 이미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만났기 때문인가. 그때 이미 호감이 결정되었기 때문일까. 글과 사람이 일치하는 모습이 반가워서일까. 글과 오히려 달라서 좋았을까. 모르겠다. 이유가 뭐든 만나면 그냥 편하고 좋으면 된 거지 모.


그런데 이거 하나는 알겠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라는 정현종 시인의 말을 나는 글 쓰는 사람을 만나면서 조금씩 확인하곤 했다.

그래서 가끔은, 글 쓰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는 것이 엄청난 행운 같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편집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생판 몰랐던 사람들과 서로 내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서로에게 열린 자세로 환대할 수 있을까. 그런 대화를 마치고 집에 오는 날은 진이 다 빠져도 기분이 좋다. 잠을 자려고 누울 때도 실실 웃음이 나오는 그런 기분, 그대들은 알랑가.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40대에 글 쓰는 사람들


>> 오늘의 코스

예술의 전당 시계탑 앞 10시 - 1층 테라로사 카페 - 예술의 전당 뒷길로 걸어올라 산책로 진입 - 우면지구근린공원 입구 쪽으로 하산 - 파전! 메뉴를 보고 정여사손칼국수집으로 갔으나 "재료비 인상으로 파전 안 팝니다" 수제비 주문 후 맛집 인정 - 배를 든든히 한 후 양재천 다시 산책 - 카페 모호 앞에서 폭풍 수다 후 양재시민의숲 역에서 헤어짐 - 다음 산은 수리산으로. 수리산 코스 커밍 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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