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기자의 온] 인공지능을 넘어서는 글쓰기
인공지능 때문에 머리 아픈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인간의 글과 AI의 글에 대해 고민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이곳저곳에서 AI로 글 쓰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권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다. 글을 쓰는 이유가 저마다 다르므로 그럴만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들에게 글을 쓴다는 어떤 의미일까 하는 궁금증도 들면서 스스로를 돌아본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AI가 쓴 글은 티가 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매일 인간이 쓴 글을 읽고 고쳐온 나는 알아챈다. 당연한 말이지만 AI가 쓴 글에는 사람이 없다. 있어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런 글에는 '내'가 양념처럼 등장한다. 무엇을 위한 글인지 알 수 없다. 자연스럽게 혼잣말을 하게 된다. 이런 글을 왜 쓴 거냐고.
그런 글은 걸어서 살아 움직이는 글이 아니라 누워서 자고 있는 글 같다. 자고 있는 글에서는 어떤 감정도 일지 않는다. 보고 있으면 지루하다. 나까지 잠들 것 같다. 얼른 빠져나오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든다. 후배는 비문이 오히려 반갑다는 농을 친다. 인간적이라면서. 20년이 넘도록 비문 고치느라 근골격계 질환을 얻은 편집기자가 한둘이 아닌데 이제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기뻐할 일인가. 모르겠다.
나도 AI의 도움을 받고자 시도해 본 적 있다. 내가 썼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을 주고 "좀 더 나은 표현 세 가지 정도 알려줘"라고 명령했다. 뚝딱 지어낸 AI의 문장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걸 내 문장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이건 내가 쓰는 표현이 아닌데? 내가 문장을 고칠 때보다 더 고민이 많아졌다. '간단히'가 되지 않았다. '겁나' 신중해졌다.
선택은 결국 내가 쓴 문장이었다. AI가 써준 글이 보기엔 그럴듯하지만 내 생각이 담긴 문장은 아닌 것 같았다. 덜컥 겁도 났다. 누군가 그 문장이 참 좋았다면서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쓴 거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아, 그 문장은 사실 AI가 고쳐준 문장이라서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갑자기 남편이 해준 국도 이야기가 생각났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보다 국도로 가는 게 더 운전하는 맛이 난다고 했던. 신호도 많이 걸리고 길도 좋지 않지만 정겨운 풍경을 볼 수 있다고. '국도를 달리는 맛'을 내가 쓴 글에서도 느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건 빠르지만 삭막하다. 건조하다. 메마르다. 때로는 속도감에 무섭기까지 하다. AI가 쓴 글도 비슷한 느낌이다. 내가 좋아하는 길이 있는데 빠르다는 이유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지 않다. 이런 결론을 내린 뒤로 글을 쓸 때 AI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AI를 글쓰기에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자료 수집 정도일까. 문장의 윤문 정도일까. 맞춤법을 교정하는 정도일까. 직접 인터뷰 한 녹취록을 주고 인터뷰 기사를 써달라고 하면 그 기사는 인터뷰를 한 사람의 글일까, AI의 글일까. AI가 윤문한 문장이 어느 정도면 글쓴이의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10%를 넘으면 AI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적나? 그럼 20%? 이것도 적나? 50%는 되어야 할까? 그렇다면 지금도 어느 글에선 'AI의 도움을 받은 글입니다'라고 써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 도움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걸까. 질문은 하나로 떨어지지 않는다. 계속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휴머니즘을 부르짖으며 후배가 물었다. "휴먼이 더 나은데, 왜 AI로 쓰는 걸까요?" 내 생각을 말했다. "자신감이 부족해서일지도. 학습한 기계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는 거 같아." 후배는 즉각 반박했다. "아닌데, 인간적인 글이 더 좋은 건데... 그걸 왜 모를까요?" 사람들 생각을 다 알 수 없느니 내가 이유를 단정하긴 어렵다. 얼핏 보기에 더 나아진 문장에서 나보다 기계가 더 낫다는 믿음이 불식 간에 생긴 것인지도.
하여 나는 바란다. '문장의 얼굴값'에 지지 않기를. AI 문장의 특징은 뻔하다는 거다. 학습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럴듯한데 뭔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뻔하고 어디선가 본 듯한 글에 내 시간을 쓰고 싶은 독자는 드물다. 투박하고 거친 문장이 끌리는 경우는 있어도. 배우 김혜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너무 잘하는 게 나는 징그러워. 그래서 연기할 때 생각해. 막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조금 미숙하게 연기하는 게 더 좋다. 끌린다. 너무 잘하면 어우 난 싫어. 너무 여우같이 잘하는 사람. 나는 조금 어딘가 부족한 게 아는 좋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노력하시는 거예요?) 노력하지. 너무 잘하지 않게. (거장의 말씀이다, 일부러 못하려고 노력하시는) 그래서 세상은 지루하지 않아. 그치?"
AI가 쓰는 글에 대한 해법이 이 말 안에 다 들어있는 것 같다. 너무 잘 쓰는 것도 난 싫다. 여우같이 잘 쓰는 문장이 아니라도 어딘가 부족한 문장이라도 괜찮다. 오히려 지루하지 않아 좋다. 허술한 문장의 즐거움. 엉성한 문장의 재미. 그런 문장은 그런 문장대로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움도 있어야 글이 지루하지 않겠지.
요가를 할 때 선생님은 항상 골반을 당겨 허리를 펴고 앉으라고 한다. 기본 자세다. 글 역시 내 문장으로 반듯하게 서야 한다. 그게 내 글의 기본이다. 그런 힘을 키우려면 스스로 문장을 지어나가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수련하듯. 말은 이렇게 하지만 쉽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안다(이 글도 퇴고를 마치지 못해서 수요일까지 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럴 때 차라리 AI에게 문장의 힘이 아니라 말의 힘을 빌려보면 어떨까. "글 쓰는 게 너무 힘들고 자신이 없어. 이런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줄래?" 멘털 관리에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챗지피티를 찾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챗지피티 시대의 고민 상담>이라는 책이 괜히 기획서로 나온 게 아니다.
AI의 글쓰기 고민은 하루에 끝나는 것 아니라 계속될 고민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고민일지도 모른다. 더 많이 고민되어야 할 이야기이고. 그즈음 <고수의 글쓰기>를 낸 이가령 작가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발견했다.
- 어느 매체에서 인공 지능 시대에 글쓰기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어떤 소양을 갖추어야 하는지요?
"인공지능은 정보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데 탁월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과 진심 어린 감정입니다. 저는 그래서 '인공지능을 활용할 때'와 '인공지능을 넘어설 때'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료 조사, 초안 작성, 구조 설계에는 인공지능을 활용하되, 나만의 목소리와 살아 있는 체험은 반드시 스스로 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공지능을 이기는 글쓰기'입니다. 인공지능이 언어를 아무리 정교하게 흉내 낸다 해도, 살아 있는 체험에서 우러난 문장은 결코 복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온라인 강의에서 수강생들이 격려의 채팅을 쏟아내주셔서 강사의 마음에 꽃송이가 만개하는 순간, 또 병원에 계시던 어머니가 회복되어 육개장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며 느낀 안도감 같은 감정은 인공지능이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이런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은 인간만의 고유한 자산이며, 글쓰기는 결국 그 '살아낸 흔적'을 담는 작업입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은 앞으로도 인간의 몫으로 남을 것입니다."
널리 퍼뜨리고 싶은 내용이다. '글쓰기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담는 행위'라는 말이 나에게도 적잖이 위로가 되었다. 그러한 삶의 태도를 발견하고 잘 전달하는 것이 나의 일이겠구나 싶어 더 잘하고 싶어졌다. 정지우 작가도 책 < AI, 글쓰기, 저작권 >에서도 AI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부를 옮기며 마친다.
"글 쓰는 사람이 걱정해야 할 건 AI의 글쓰기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글을 삶으로 증명하는 일이다. 나의 삶을 나의 글로 쓰면서, 작가는 독자와 더 진솔한 관계를 맺도록 요구받는다. 작가의 경쟁자는 AI가 아니라 거짓된 삶, 거짓된 자신이다. 이제 작가는 자신을 온전히 독자에게 건네주면서 그들의 신뢰에 보답하며, 자기만의 안목으로 만들어가는 자기다운 삶으로 자신의 글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에 성공하는 한, 작가에게 위기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