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기자의 오프] 병원 투어
"건강검진은 내 몸의 상태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는 것."
김미경 선생의 말이다. 요즘 그 어떤 문장보다 와닿는다. 7월 말에 대학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했다. 그 결과가 8월 중순에 통보되었다. 간호사가 전화를 걸어 말했다.
"갑상선 혹이 조금 커졌는데 진료 받으시는 병원에서 한번 체크하시고요... 신장도 다니시는 병원 있으시니까 계속 잘 체크하시면 될 것 같은데... 피검사 결과...간담도췌장 부분 수치가 좀 높게 나온 게 있어서 외래 잡아드리려고 합니다. 또 산부인과 결과 수치도 높아서 다니시는 병원에서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지난 6월 산부인과 검진에서 1년 넘게 추적 관찰한 난소에 있는 혹 사이즈 변화도 없고 괜찮다고 해서 1년 후 예약을 잡고 왔건만, 이게 무슨 말이람? 그리고 간담도췌장은 또 무엇?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간담도췌장 소화기 내과 예약은 금방 잡혔다. 문제는 산부인과 진료를 받던 대학병원. 담당 간호사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2주 후로 예약이 잡혔다. 시아버지 장례를 치른 뒤로 쉬는 날이면 족족 병원으로 향했다.
일단 간담도췌장 건부터. 외래 후 검사예약. 의사가 말했다. "수치가 좀 높네요? 이건 시티를 찍어서...(제가 시티를 찍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mri. 간단하게 체크해보면 됩니다. 검사도 간단하고요." 1분 진료 끝. 일주일 후 mri 검사. 다시 일주일 후 외래 진료. "다 깨끗합니다, 문제가 없어요. (신장 내과 선생님이 신장 기능이 떨어지면 이 수치가 좀 높게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네 그렇기도 합니다. 그리고 환자분이 원래 이 수치가 좀 많이 나오는 편인 것 같기도 하고요. (확인해보니, 1년 전, 2년 전에도 이 수치가 높았어요. 내년에도 이 수치가 높으면 다시 검사하나요?) 음. 그렇다면 수치를 따로 적어두고 변화폭을 좀 보세요. 비슷하면 그냥 둬도 되고 차이가 많이 나면 다시 내원 하시고요. 지금으로서는 괜찮습니다."
얼마나 많은 혹시를 생각했던가. 억울하다고 해야할지,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당연히 다행이지. 암암. 남은 건 산부인과. 1년 후에 만나기로 한 교수님을 두 달 만에 볼 줄이야.
"수치가 좀 높네요. 흠... 우리가 전에 mri 찍고 혹 크기나 상태도 다 확인을 했는데... 수치가 높게 나온 것은 자궁내막증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럼 수술을 합시다."
아? 나 수술? 이렇게 갑자기? 작년에는 근골계질환으로 나를 시험에 빠뜨리시더니 올해는 혹이네. 뭐 고민할 사이도 없이 수술 예약 잡고, 심전도 검사, 흉부 사진 찍고, 체혈까지. 수술 전에 필요한 서류 챙겨와서 다시 신장내과 교수 외래 봐야 한다고. 네네. 그러시죠. 3주가 그렇게 흘렀고 지난 금요일 오후 신장내과 외래 보고 왔다. 끝인가 싶었는데 갑상선에 물혹 있는 거 때문에 갑상선 기능 검사 한다고 다시 체혈. 지난 건강검진에서 이상없다고 소견 나왔는데, 검사비 또 지출. 그렇게 29일에 입원해서 수술 후 퇴원할 예정이다.
수술을 결정하면서 회사에서 9월 이후 계획했던 사업은 다 스톱. 인사이동으로 같이 일하게 된 후배에게 본의 아니게 미안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뭔가 으샤샤으쌰 열정을 불태우고 싶을 때 확 질러줘야 하거늘 그럴 수가 없게 됐으니까. 사람 일 참 계획대로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차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나이 들어서 아프니까... 왜 그런지 남편에게 좀 미안하더라. 고생시키는 것 같고."
작년에 결혼한 후배가 말했다.
"에이 선배 무슨. 그럴려고 결혼한 건데요? 고생할 때는 해야죠. 선배는 안 할 건가요?"
순간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생각나버렸다. 결혼식 혼인 서약이. 이 맹세가.
"신랑에게 묻겠습니다.신랑은 신부를 아내로 맞이하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한결같이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신부에게 묻겠습니다. 신부는 신랑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변함없이 남편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올해로 결혼 20년차인데 신혼에게 또 하나 배웠네.
수술할 때는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건 하고 가야지. 서둘러서 새시민기자 오티 준비 돌입. 주말엔 브런치 원고도 쓰고, 연재 원고도 써야지 했는데 토요일 오전부터 보기 시작한 <은중과 상연>을 5회차까지 휘몰아치다가... 이러면 안 되지, 정신 차리고 도서관 오니까 참 좋다.
사람 없고, 조명도 낮고, 내 옆에는 안희연 산문도 있고. 노트북도 있고. 자판을 칠 손도 있고. 눈도 있고. 숨도 쉬고 뭔가 다 가진 기분이네.
이번에 공저로 책을 내면서 저자 소개에 이렇게 적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쓰고 싶다'라고. 쓸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 쓸 수 있는 게 넘치도록 행복하다. 그러니 쓸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써야지. 나보다 훨씬 글을 잘 쓰고 책도 많이 팔리는 선배가 며칠 전 내게 한 권의 새 책 마감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은경아, 하루라도 젊을 때 많이 써라. 나이 먹으면 집중력이 확 떨어진다. 힘도 부치고. 아이디어도 말라가. 많이 써. 쓰고 싶고 쓸 수 있을 때."
뭔가 쓸 수 없을 때를 생각하니 너무 슬프다. 한없이 슬프다. 이 좋은 것을 할 수 없게 될 때가 올까. 올지도. 어디 그게 글 뿐일까. 숨 쉬는 것, 걷는 것, 뛰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을 때, 그럴 때가 온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그러니 건강검진에 불안해 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도록 나를 잘 돌보며 살아야지.
발행을 밍기적거리는 사이, 화요일이 되었고 남편은 건강검진을 하러 갔다. 그의 안녕을 빌었다.
미루는 사이 금요일. 시간이 너무 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