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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경 Jun 13. 2018

“힘들면 내려갈까?” 아빠는 한번도 묻지 않았다

[엄마가 한번 해봤어] 아빠랑 딸이랑, 단 둘이 한라산 종주기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휴가였다. 제주도 4박 5일. 구체적인 여행 계획은 잡지 않았다. 다만 남편과 열두 살 큰아이(아래 진이, 가명)는 하루 한라산에 가기로 했다. 8살 둘째아이는 아직 무리일 것 같아서 그날은 나랑 따로 일정을 잡기로 했고. 여행 첫날, 협재해수욕장을 시작으로 중문, 서귀포 쪽을 돌았다. 아이들은 다른 관광지는 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바닷가에서 신나게 놀았다. 정수리가 빨갛게 타들어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한라산 등반을 염두에 두고 계속 날씨를 살피던 남편이 드디어 날을 정했다. 돌아오기 바로 전날이었다. 저녁을 든든히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한라산에서 먹을 컵라면과 초콜릿 약간, 물 2병을 샀다. 요즘은 한라산에서 컵라면을 팔지 않는다며 남편이 준비한 거다.

“뜨거운 물을 가져가야 하는데 (무거울텐데) 굳이 그래야 하나?” 이런 내 말에도 남편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산에서 먹는 라면 맛이 제일 기억에 남을 거라나?(결과적으로 남편의 이런 생각은 실화가 됐다) 한라산 등반 전날 밤, 큰아이도, 남편도 살짝 긴장한 눈치였다. 왜 안 그럴까. 평소 등산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고 한라산은 무려 해발 1950m인데... 아이들이 먼저 잠들고 난 후에도 남편은 밤 늦도록 이것저것 챙기느라 분주했다. “왜 이러지? 내가 소풍가는 것도 아닌데?”라며 뒤척이면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일찍 갔다 일찍 내려오자는 계산으로 남편과 아이는 오전 7시 반에 숙소를 출발, 8시 반부터 한라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먼 길 떠나는 부녀에게 평소 잘 안 먹는 국물까지 끓여 아침을 먹여 보냈다. 그러길 정말 잘했다. 김밥 같은 걸 사서 가면 더 늦어질 것 같아서 바로 올라갔다는데 등반하며 먹은 거라곤 컵라면과 초콜릿 약간이 전부였다고. 내려올 때는 물도 없어서 갈증을 계속 참아야 했단다. 세상에나 그러고 8시간 반을 걸었다니. 아빠가 잘못했네, 정말.

진달래대피소에서 진이가 컵라면을 먹는 걸 봤던 아주머니를 정상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러더란다. “컵라면 먹은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거냐?”고. 진짜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진이는 한라산에 오르기 힘들다는 말도 물론 수없이 많이 했지만,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올라가면서 만나는 어른들마다 사탕도 주시고 간식도 주셨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는데, 그건 아니었어. ㅜ.ㅜ"


그 말을 듣던 남편도 “어른들이 진이를 볼 때마다 대견하고 대단하다”는 말을 많이 해주셨다고 치켜세웠다. 그 말이 묘하게 감동적이더라. 어쩐지 진이가 정상까지 갔다 무탈하게 내려올 수 있었던 게 그분들의 응원도 한몫 단단히 한 것 같아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었다"고 말하면서도 진이 표정이 하나도 어둡지 않았던 이유가 분명 있었던 거다. 내심 스스로도 대견하고 뿌듯했던 게 아닐까.



사실 제주도에 오기 전, 큰아이가 한라산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전혀 뜻밖이라. 나중에야 그 이유를 남편에게 들었다.


"진이한테 한라산에 같이 갈래? 하고 가볍게 물었더니 가겠다고 하더라고. 자기 버킷리스트에 있었다면서."
 "버킷리스트? 걔가 그런 게 있대? 버킷리스트 또 뭐가 있대?"
 "몰라. 그냥 그때그때 조금씩 생기나 봐. 사실 난 한라산 둘레길 같은 한두 시간 코스를 생각하고 말했던 건데... 백록담이 보고 싶었나봐. 나는 진이가 그런 목표가 있고 그걸 이루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게 좋았어. 그런데 산에 올라갈 때 너무 힘들어서 5분마다 시간을 계속 물어보는 거야. 알려주면 '아직 5분 밖에 안 지났어?' 이러면서."
 "아, 그랬구나. 왜 안 그렇겠어. 8시간 반을 걸었는데. 나였으면 '힘들면 돌아갈래?' 하고 물어봤을 텐데 자긴 안그랬어?"
 "응. 안 그랬지. 나도 진짜 힘들긴 했는데,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계속 좀만 더 가면 된다고 말했어. 뒤에서 좀 밀어주고 하면서. 힘들면 좀 쉬기도 하고. 근데 한라산에 벌레가 너무 많더라."
 "아, 그랬구나. 평소 같으면 벌레 때문이라도 그냥 돌아가자고 했을텐데... 그걸 참고 견디고 8시간 반을 걸었다니, 생각할수록 너무 대견한 것 같아."


남편에게 한 수 배웠다. 아이를 위한다는 이유로, 배려한다는 이유로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때로는 아이의 도전 혹은 실험을 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때로는 조금 무모하더라도, 고되더라도 말없이 함께 해주는 게, 그저 응원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일 수도 있음을 부녀의 한라산 종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후로도 진이의 한라산 등반 사건(?)은 한동안 회자되었다. 시부모님이 대견해하셨음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애나 어른이나 진이가 한라산 정상에 다녀왔다는 말을 하면 "대단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진이가 한뼘 더 자라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이런데 본인은 더 그렇겠지. 그 기분, 그 느낌이 살아가는데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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