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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경 Jun 15. 2018

아이와 제주도 여행, 운전하지 않아서 생긴 일

[엄마가 한번 해봤어] 표선에서 사려니숲-옐로우스토어-제주시내까지

남편이 큰아이와 한라산 등반을 간다고 했을 때, 내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운전을 못하는 나와 둘째는 뭘 해야 하나? 숙소에만 있기는 아깝고. 이 참에 제주도 버스투어에 한번 도전해봐?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편이 등반 준비에 정신을 없을 때, 나는 내 나름대로 코스를 짜느라 정신이 없었다. 드디어 남편이 큰아이와 이른 아침 한라산 산행에 나섰다. 남편이 차를 가져가야 하니, 짐은 다 싸서 챙겨 보내고 나는 가벼운 배낭 하나면 남겼다. 아빠 껌딱지 둘째는 아빠가 일찍 나가는지도 모른 채 늦잠을 자다가 기분 좋게 일어났다. 하루 종일 이리 저리 다닐 내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째는 아침을 먹고 숙소를 한 바퀴 산책하는데도 별말 없이 동행해줬다. 까칠하게 굴지 않아서 고마웠다. 그쯤 남편은 이제 정상에 올랐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숙소가 있는 표선에서 사려니숲으로 가는 길. 다행히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야호. 20여 분을 기다렸다가 버스에 올랐다. 물론 아이가 잠자코 기다려줄 리 만무했다. 기다림이 지루한 아이를 위해 편의점 투어도 미리 다녀왔다. 목캔디 하나에도 아이는 그저 다 이룬 것 같은 표정이다. 버스를 타자마자 아이는 잠이 들었다. 그 덕에 나는 혼자 여행을 온 것 마냥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제주의 풍경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려니 숲길에 다 왔을 때쯤 아이를 깨웠다.



내리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한눈에 봐도 깊은 숲이었다. 인적도 드물었다. 까마귀가 시끄럽게 우는 숲길을 아이와 둘이 걸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연두연두, 초록초록한 세상. 나무 사이로 깊게 드리우는 햇빛마저 부드럽게 느껴지는 곳. ‘이곳이 천국이구나’ 싶을 무렵, 아이가 말했다.

“엄마, 이제 그만 돌아가자.”
‘그래. 이 말이 안 나오면 이상하지.’


예상은 했다. 온통 나무와 돌뿐인 곳, 아이에게 신날 게 없었다. 여덟 살 아이에게는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도 살짝 그랬다. 평화로움을 넘어 너무나 고요해서 약간 무서웠다. 끝을 알 수 없는 숲길을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고. 그렇게 아이와 20분쯤 걸었을까? 둘이서 하면 시간도 잘 가고 유쾌한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재미가 없었다. 돌아가는 시간도 고려해야 했기에 미련을 버리고 과감히 돌아섰다. 그래도 거기까지 함께 걸어준 딸아이가 있어 감사했다. 혼자였다면 10분도 못 걸었을 것 같다. 생각보다 소심하여서리.

다시 돌아온 사려니숲 버스정거장. 다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검색 몇 번만으로도 버스가 언제 도착하는지 알 수 있다. 여행하기 편한 세상이라는 걸 새삼 실감한다. 이다음 코스는 뭐냐고? 이럴 줄 알고 준비했지. 둘째 아이가 좋아할 만한 곳. 옐로우스토어라는 곳이다. 먼저 이곳에 온 지인에게 추천받았다. 도시락이 맛있다는 곳인데, 과연?

버스가 올 때까지 딸아이는 가져온 학습만화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옐로우스토어는 사려니 숲에서 버스 타고 한 정거장. 걸어서는 15~20분쯤 걸린다고 했다. 무조건 버스를 타야 했다. 나는 아이와 함께 다니는 중이니까. 그런데 이게 뭐라고, 제주에서 운전하지 않아도 원하는 데를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큰아이가 아빠와 함께 한라산에 가고 둘째랑 버스투어를 했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운전 못하잖아"라며. 운전 안 해도 가능하다, 충분히. 기다림을 적당히 즐길 줄 안다면, 빨리빨리 이곳저곳을 다니지 않아도 된다면 버스투어도 괜찮다. 오히려 제주의 풍경을 오롯이 내 눈에 담을 수 있어 더 좋았다. 이 모든 건 물론 아이가 협조해줄 때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기 위해 나는 아이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낮아져야 했다. 아이가 하는 말을 끝까지 귀담아 들어야 했고(내가 잘 못 알아들으면 불호령), 보라는 데를 보고(안 보면 불호령), 사달라는 거를 사줘야 했다(안 사주면 징징). 사진은 본인 허락받고 찍어야 한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여덟 살 둘째. 그의 입에서 찍으라는 말이 나와야 나는 비로소 찍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분을 제대로 모셔야 했다. 그분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평화로운 여행의 비결. 아이를 위해서? 노노, 오로지 나를 위해서!


다행히 아이는 옐로우스토어를 마음에 들어했다. 6천 원이나 하는 비싼 생과일주스 대신 물을 먹겠다고 해서 그저 감사하고 황송했다. 도시락 치고 밥 값도 비쌌지만 먹고 싶다는 걸 사줬다. 입이 짧은 아이가 "엄마 이거 맛있다"며 싹싹 비웠다. 덕분에 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여유 있게 마실 수 있었다.

잠시라도 지루한 걸 못 참는 아이, 색칠공부를 하겠다고 해서 아이패드를 내줬다. 그 틈에서 나도 여유를 부리겠다고 책을 조금 읽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였다. 내용을 떠나, 우리와 딱 맞는 제목이었다. 그때 마침 우리보다 한참을 걷고 또 걸었을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내려가고 있어.'

얼추 시간을 계산해보니 우리가 한 번 더 버스를 타고 제주 시내에 있는 숙소로 들어가면 남편이 오는 시간이랑 맞을 것 같았다. 원래는 남편이 차를 가지고 이곳으로 오기로 했다. 한라산에서 30여 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옐로우스토어에서 숙소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있으니 굳이 남편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남편도 산행하느라 지쳤을 테니. 아이 손을 잡고 나섰다. "우리 파란 버스 타러 가자." 아이는 버스를 타자마자 다시 잠이 들었다. 제주의 풍경은 또 다시 오롯이 내 것이 됐다.

'운알못'(운전을 알지 못하는) 엄마의 제주도 일일 버스투어,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숙소가 마음에 든 아이는 오자마자 텔레비전 타령이다. 끝까지 상전으로 모시기로 다짐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야 내가 읽다 만 책을 한 장이라도 더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리모콘을 손에 쥔 아이, 오늘 하루 가장 만족스런 표정이다. 아이고, 아이야. 여행을 왜 왔니.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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