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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경 Jul 03. 2018

밥 먹는데 핸드폰 보는 남편, 나는 좀 불편하다

[엄마가 한번 해봤어] 소심한 가출

늦잠이 허락되는 쉬는 날 아침. 밥이 조금밖에 없다. 간단하게 있는 걸로 때우기로 한다. 바나나를 우유와 함께 갈고, 수박과 참외를 준비한다. 전날 아이가 먹다가 남은 떡꼬치와 데운 찬밥 약간 하고. 조촐하게 차려진 밥을 먹으려는데 남편이 음악을 튼다.


“이건 무슨 노래야?” 큰아이가 묻는다. “엄마가 좋아하는 그룹 노래야” 내가 좋아하는 그룹 노래는 맞지만, 남편은 노래를 ‘듣기만’ 할 게 아니라 영상을 ‘볼’ 게 분명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편했다. ‘밥 먹는데 유튜브 영상은 안 보면 좋겠는데...’

내 속마음이 들릴 리 없겠지만, 눈치 없는 남편의 말. “이 뮤직비디오가 되게 특이...” 그 순간, 내가 말을 잘랐다. “밥 먹는데 그거 안 보면 안 돼?”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가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그래, 알았어”. 내가 정색하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남편은 그렇게 들렸는지 핸드폰을 옆으로 세게 밀어둔다. 그 둔탁한 소리가 기분 나쁜 소음처럼 들렸다.                     


기분이 나쁘다는 표현이다. 근데 나도 그렇다. 밥 먹을 때 핸드폰 보는 거 안 좋아하는데 왜 굳이 그걸 보면서 먹으려고 할까. 애도 안 하는 걸(못하는 거겠지만) 하는 걸까. 10년 넘게 살았으면 내가 싫어하는 걸 어느 정도는 알 텐데 ‘조금만’ 노력해주면 안 되는 걸까. 보란 듯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데 짜증이 확 났다. 1분 아침을 먹고 자리를 뜨는 남편. 나도 말없이 밥만 먹었다. 비오기 직전 같은 날이다. 내 기분이 그랬다.

뒷정리를 하고 씻고 옷을 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어디 갈 데도 없으면서. 그러다 보니, 정말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가방에 이것저것을 챙겨 넣고 거실에서 텔레비전과 한 몸이 되어 구르고 있는 ‘이씨들’에게 눈도 안 마주치고 말했다.

“엄마 나간다.”
“응? 엄마 어디가?”
“밖에. 집에 있기 싫어서.”
“응?”

의아해하는 아이들 반응을 살필 겨를도 없이 현관을 닫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기 싫다’는 말이 심했나?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걱정도 됐다. 나중에 애들이 집에 있기 싫다고 나가버리면 어쩌지? “엄마도 예전에 그랬잖아”라면서. 그날따라 엘리베이터는 왜 그렇게 더디게 오는 건지.


그림책 <돼지책> 속 엄마가 떠올랐다. 돼지같이 먹기만 하고, 텔레비전만 보고, 치우지 않는 가족들. 엄마의 노동을 당연시하는 가족들을 두고 홀연히 사라지는 엄마. 그 엄마도 그런 집에 있기 싫어 떠났을 거다. 꼭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나는 이런 순간, 집에 있기 싫다.

대화 없는 식탁. 가짓수 많은 12첩 반상은 아니지만, 식탁에서 가족들이 모여 앉아 “이게 맛있네”, “저게 맛있네”, “이건 이렇게 만들었네”, “저건 저렇게 만들었네” 이야기하며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눈도 귀도 입도 즐거운 밥을 먹고 싶다.

텔레비전 소리 가득한 거실. 거실에서 2~3시간 이상 텔레비전을 ‘보고만’ 있고 싶진 않다. 볼 것은 보고, 안 봐도 되는 걸 끊지 못하고 굳이 틀어두고 있는 집에서 나는 ‘있기’ 싫다. 시간을 그저 뭉개고만 있고 싶지 않다.

문제는 우리 가족 중에 나만 그런 것 같다는 것. 아이들과 남편은 시시콜콜한 대화가 없어도, 거실에 텔레비전 소리가 가득해도 별문제 없이 산다. ‘이씨들’ 입장에서는 이런 내가 불편할 수도 있다. 불편한 마음이 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니, 그걸 보는 가족들도 불편하겠지. 그래서 나갔다. 걸었다. 걷다 보니 마음도 누그러진다. 혼자 ‘이씨들’ 험담도 하고 그러는 동안 다행히 갈 만한 데도 생각났다. 가서 해야 할 일도 떠올랐다.

“싸울수록 투명해진다”라고 은유 작가는 말했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와 닿지 않았다. 나중에 그 의미를 알고 난 뒤에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라고 생각했다. 내 부모는 그토록 줄기차게 싸웠지만 결코 투명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싸우지 않는 편을 택했다. 싸우지 않아도 투명해질 수 있다고, 서로 이해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살면서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랬는데 요즘은 살짝 위태롭다. 좀 싸워보는 것도 필요할까. 내가 우리 문제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고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반전은 없었다. 나는 다시 싸우지 않는 편을 택했다. ‘원고 쓰느라 나왔다고. 밥 먹을 때 전화하라’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낸 것. 남편은 순하게 답 문자를 보내왔다. 그리고 1시간 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카페로 왔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늘 그렇듯 순한 표정으로.

생각해보면, 남편은 결혼하면서 유일한(?) 취미였던 게임을 끊었다. 별다른 취미가 없는 남편의 유일한 낙은 텔레비전 보기다. 거기에 맥주 한 잔이면 세상 다 얻은 것 같은 표정이 된다. 보다 못해 “당신도 취미 생활 좀 가져”라고 하면 내 핑계를 댄다.

“내가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 당신이 싫을 텐데... 내가 낚시나 등산, 조기축구를 취미로 한다고 주말마다 나가면 나가면 당신 좋겠어?”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안 좋겠지. 그런데 사실 저런 취미는 남편 스타일이 아니다. 저런 취미를 시작할 리가 없다는 말이다. 괜히 내 핑계를 대는 것일 뿐. 혼자 외동으로 자란 남편이 낯을 많이 가리고, 함께 하는 일보다 혼자 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낀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꿈꾼다. 남편이 소파 위에서 자주 벗어나 주길. 부모님이 원치 않아 포기했던 그림 공부를 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하는 배드민턴이나 탁구, 볼링 같은 운동을 해도 좋겠다(가끔 하긴 하지만). 그걸 위해 나의 도움 혹은 배려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서겠다. 적어도 텔레비전과 한 몸이 되어 뒹구는 걸 볼 때보다는 덜 불편할 것 같으니까. 다자매, 너희들도 ‘텔레비전 잘 틀어주는 아빠’와는 이제 그만 안녕 하자. 아빠는 원래, 밥 잘 사주는 오빠였거든.


PS. 이 글을 쓰면서 남편은 어떨 때 내가 불편한지 조금 궁금해졌다. '글빨' 받았을 때 원고 써야 한다며 퇴근하자마자 컴퓨터 앞으로 와버리는 바로 이런 경우에 그럴까? 조금 전 옆으로 와서 “다 썼어?” 하고 묻는 남편의 낌새가 수상하다. "왜? 내가 글쓰고 있는 게 불편해? 싫어?" 무서워서 차마 물어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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