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없으면 과연 불행할까?
해외살이로 깨달은 집에 대한 새로운 생각
2016년, 운이 좋게 해외취업을 하게 된 나는 8개월간의 짧은 해외살이를 하였다.
7개월간은 세부에서 일을 하였고 1개월간은 보라카이와 홍콩을 여행하였다.
1년도 안되는 시간동안 내가 머문 집과 숙소는 총 7곳.
길게는 4개월 짧게는 하루. 짐을 싸다니며 이곳저곳에서 머물렀다.
3월~5월 : 세부 - C 빌리지
6월~9월중순 : 세부 - B 빌리지
7월 1주 : 세부 - 필리핀 현지인 친구 집.
8월 홍콩여행 : 홍콩 - R 게스트하우스, H호텔
9월 마지막 2주 : 세부 - N 게스트하우스
10월 : 보라카이 - W 게스트하우스
이런 방랑자같은 생활을 하면서 나는 집의 소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사람들에게 집이란 '소유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할 때 집을 소유하고자 하며, 그렇지 못하는 경우에는 언젠가 '내집마련'을 하겠노라 굳은 다짐을 한다. 나 또한 그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고, 점점 다가오는 결혼 적령기 나이에 결혼자금에서 크게 한 몫 하는 '내집마련 자금'을 생각하면 그저 한숨만 나왔다. 나에게는 아직 갚지 못한 학자금 대출이 무려 2500만원이 있다. 월급에서 매달 40만원씩 빠져나가는 학자금을 갚다보니, 결혼을 위해 저금할수있는 돈은 겨우 30~40만원이었다. 1년을 꼬박 모아도 400만원정도밖에 모을 수 없다. 결혼식에 드는 비용만 평균 2~3천만원이라던데... 내집마련은 커녕 결혼자체를 포기해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결혼자금마련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던 중. 나는 해외취업을 떠났다. 집 없이 이곳 저곳에서 살아가는 삶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 집이 없어도 살만했다. 아니, 8개월 간 집 없는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이곳 저곳 옮겨다니는 삶은 집이 없어 불행하다기보단 오히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게 다가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그 곳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집의 소유에 대한 생각보다 '그 공간에서의 행복'에 더 집중을 하고 있었다.
집이 없어도 행복을 느끼다.
보라카이에서 3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세부로 돌아왔다. 그 날은 필리핀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이었다. 그 전에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 잠시 맡겨두었던 짐을 찾아 한국으로 떠나야 했다. 짐을 찾으러 가기위해 숙소로 향하던 중이었다. 트라이시클(오토바이 택시)을 타자마자 운전기사는 나를 보더니 "너 베이스워터 가지?"라고 묻는 것이다. 오마이갓! 베이스워터는 이전에 4개월간 거주했던 빌리지였다. 거의 한달간 나는 이곳에 없었지만 기사님은 한달 전 이곳에 살았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3주동안이나 나는 이 곳에 없었는데도, 나는 이 나라사람도 아니었는데도, 이렇다할 집도 없었는데도, 그들은 나를 이곳에 살고있는 사람으로 기억해주고 있음에 너무나 큰 감사함을 느꼈다.
필리핀은 나에게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 집도없고 그 나라 사람도 아니지만,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는지 모두 알고있고 그 공간의 사람들도 나를 기억해주고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세부의 막탄에 자주가던 단골 식당에 뛰어들어가면 "어? 오랜만에 오셨네?" 라며 나를 반겨줄 사람들. 4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먼 나라, 한 마을의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많은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비록 집이 없었지만, 나는 그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필리핀의 한 마을에 외국인으로서 말이다.
집을 소유한다, 하지 않는다는 사실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에서 행복한가' 였다. 필리핀에서 나는 집도, 가족도, 친구도 없었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나를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공간속에 살아가면서 나를 반겨주고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 점을 가만히 생각해보고 있자니, 어릴 때 우리 집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우리집은 꾀 잘 살았다. 30평대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아버지의 퇴직으로 경제사정이 매우 나빠져서 상가건물에 딸린 10평 남짓한 곳에서 네 식구가 옹기종기 거실을 방으로 쓰며 생활을 했다. 그 때의 우리 가족에게 큰 행복은 없었지만 너무 불행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제대로 된 집이 없었지만 끝가지 가정을 지키고자하는 부모님과, 형편속에 맞춰 살아가며 행복을 찾으려는 나와 동생.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이 네 식구 중 어느하나 삐뚤어진 이가 없었기에 우리는 일상 속 소박한 행복을 느끼며 어려운 삶을 이겨냈다. 그 이후로 8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우리가족은 집 없이 여기저기 월세로 떠돌아 다니고 있다. 몇해 전에는 부모님께서 파산을 하셨고 현재까지 회생중에 있으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족은 형편에 비해 매우 행복한 편이다. 주말이면 부모님은 단 둘이서 여행을 떠나시고 핸드폰 카메라로 서로를 찍어주며 "여기 너무 좋다~"라며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오신다. 나도 지금은 10평 남짓한 작은 자취방에 동생과 살고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일로 삼고있고 미래의 계획을 꼼꼼히 세우고 있기에 행복한 삶을 살고있다. 동생 또한 자신이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취준생 생활을 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있다.
빚은 있어도 집은 없다. 그런데 행복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결혼자금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해외살이를 마치고 나서, 나는 결혼자금이 없어도 행복한 결혼식을 올릴 수 있고, 행복한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을 살 여력이 없으면 전세집에 살면되고 그보다도 안되면 월셋집에 살면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해서 어떻게 월셋집에서 사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현재 월셋집에 살고있는 나는 불행한가? 아니, 나는 지금 행복하다.
집도 없는데 왜 행복할까? '그 공간에서의 행복'을 찾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좋은 집에 사느냐보다 얼마나 행복하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비록 작은 월셋방이라도 집에 들어서면 신혼 분위기나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소품이 가득하고 나를 행복하게 맞이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둘만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나는 결혼해서 집을 당장 마련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신혼여행 대신 남편과 함께 외국으로 떠나서 1~2년간 집 없이 떠도는 생활을 해 보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굳이 집을 마련할 거대한 돈을 모을 필요도 없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집은 없지만 더 많은 새로운 경험과 추억을 쌓을 수 있을 것이며 행복할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디지털 노마드'라 불리는 젊은이들이 있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개념은 한국에서 생소하지만 그들은 집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일을 한다. 그들은 집이 없지만 이나라 저나라 떠돌아다니는 삶을 행복해 한다. 그들에게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거추장 스럽고 애물단지같은 존재일 것이다. 집에 대한 생각이 점점 바뀌고 있으며 집의 소유는 이제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될 것이다. '집 없는사람=돈없는사람', '집 있는 사람 = 돈있는 사람' 이란 공식이 아닌, 돈이 있어도 집을 꼭 가지지 않는,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주거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