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 지구에서 살아갈 권리
1년 전인가, 길고양이에 관한 주제로 인터넷 상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길고양이가 불쌍하다며 밥을 주려고 하는 사람들과 고양이에게 밥을 주면 동네가 더러워진다고 싫어하는 사람들. 이 둘 사이의 싸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인간이 동물에게 '이곳에서 살지 말라'고 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구는 모든 생명체의 것이다. 인간들 때문에 점점 살 공간을 빼앗기는 동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살란 말인가. 길고양이의 집은 길이고, 그들의 주식은 사람들이 버린 음식이다. 그것이 길고양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동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사는 동네에 길고양이들이 이전보다 더 많이 몰려온다면, 고양이에게 밥 주는 사람이 싫기는 하겠다. 그렇다고 고양이를 일부러 죽인다던지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4개월 전 필리핀으로 날아왔다.
필리피노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참으로 느긋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마트에서 계산하는데 줄을 10분 이상 기다린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20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기다리는 손님 줄이 저만치 늘어섰는데도, 계산하는 직원은 느~릿~느~릿 옆 직원과 수다를 떨면서 계산을 해준다. 그래도 어느 하나 불평하는 이 없다. 늘어진 긴 줄 사이에서 인상 찌푸리며 짜증을 팍팍 내고 있는 사람은 한국인 '나' 하나뿐이었다.
이러한 느긋한 성향을 가진 필리핀 사람들은 동물에 대해서도 정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동물은 동물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같이 공존하여 살아간다. 이 곳 필리핀에서는 염소나 커다란 덩치의 큰 소들을 한국의 길고양이들처럼 길에서 흔하게 마주칠 수 있다. 그들의 덩치는 사람보다 훨씬 크지만, 절대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 사람들 또한 동물을 해치지 않는다. 큰 소나 염소 가족이 길을 느긋히 건너갈 때면, 쌩쌩 달리던 필리핀의 버스 지프니도, 트라이시클도, 일제히 모두 멈추어 동물들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동물들이 길을 모두 건너면 그제야 다시 쌩쌩 달린다.
이곳은 고층 아파트가 많이 없는 대신, 빌리지라는 개념의 주택 단지가 있다. 나는 두 곳의 빌리지에 살아보았는데, 빌리지 내부의 길에는 한국처럼 길고양이들이 참 많다. 빌리지 내에서 길을 걸으며 유럽풍으로 지어진 주택들을 구경하느라 하나씩 눈에 담으며 지나다니다 보면 집 앞에서 느긋하게 아침햇살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처음에는 각각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들이라 생각했다. 언젠가, 길을 걷다 만난 고양이가 어느 한 주택으로 들어가더니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보고 저 주택에 앉아있는 고양이들이 모두 주인 없는 길고양이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렇게 길고양이가 많다보니 밤 늦은 시각에는 고양이들이 영역싸움하느라 울부짖는 소리가 종종 들려온다. 그래도 어느 누구 하나 길고양이를 퇴치하려 든다던지 토막 살해한다던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양이들은 원래 그런 아이들이라 생각하고 싫으면 그냥 내쫓을 뿐이다.
어느 날, 동생이 필리핀에 놀러 왔다. 동생은 숙박할 돈이 넉넉지 않아 내가 소개해준 필리핀 친구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그 친구의 집을 가는 길은 좁다란 골목길을 여러 모퉁이 돌아 들어가야만 했는데, 그 길에는 고양이가 아주 많았다. 어느 집이든 길 고양이가 한 마리씩 쉬고 있었으며, 차위를 고양이들이 점령한 경우도 많았다. 어떤 집은 길고양이가 7~8마리씩 있는 집도 있었다. 친구의 집에 도착하니, 밀키라는 이름의 개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새끼 고양이는 친구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라 길 고양인데, 매일같이 자신의 집에 온다고 했다. 이곳은 한국에 비하면 고양이가 살기 정말 좋은 나라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옆집에서 키우는 개가 짖는다고 해서 집주인이랑 싸우지도 않는다. 그 집 개좀 조용히 시키라고 소리치는 것은 역시나 한국인뿐이다. 빌리지를 순찰도는 가드에게 항의해보아도 풀리지 않는다. 가드는 그저 집을 지키는 개가 짖는 것은 당연하다. 개보고 조용히 하라고 할 권리가 없다는 이야기만 할 뿐.
그렇다. 동물들은 원래 그렇다.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듯, 동물들도 감정표현을 위해 울부짖는 것이고, 사람들이 음식을 먹듯, 동물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을 찾기 위해 쓰레기 통을 뒤지는 것이다.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기 위해서 서로 배려가 필요하 듯, 서로 다른 생활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동물이 같이 살기 위해서는 서로의 배려가 필요하다. 고양이가 우는소리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또는 고양이가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이유로 길고양이를 맘대로 죽이는 것이, 층간소음 때문에 윗집 사람을 죽이는것과 무엇이 다르랴.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곤충이나 벌레가 집안으로 들어오면 살려줄 수 있다면 살려서 쫒아 보낸다. 파리를 때려죽인 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다. 파리는 모기와 달리 사람들을 물지 않으며, 굳이 파리채로 죽이지 않아도 쉽게 쫒아보낼 수 있다. 개미 때도 그렇다. 이 곳 필리핀에는 방한 켠에 과자 부스러기 하나 흘리고 이틀을 방치하면 무시무시한 개미 때들이 몰려온다. 너무 많은 개미 때들은 감당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죽여서 처리해야 할 때 도 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을 때에는 개미 때가 몰려온 원인을 제거하고 땅을 두들기니, 개미들이 적이 나타남을 감지하고 알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작은 생명도, 징그럽게 생긴 곤충도, 다 각자의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소중한 생명이라는 생각에 쉽게 죽일 수 없었다.
제품 디자인을 전공한 나는 가끔 파리채나 찐득이 덫을 보면 생명을 죽이는 도구보다, 생명을 살려 쫒아보낼 수 있는 더 나은 도구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가끔 감당할 수 없는 벌레가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약을 쳐야 할 때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벌레의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생명을 굳이 죽여서 없애야 할까, 벌레도 이 땅에 태어난 생명인데, 내가 그들의 생명을 쉽게 빼앗아도 될까.
어떤 이들은 사람들이 먹는 돼지, 닭, 소는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길고양이는 불쌍한가?라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이 싫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과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 필요 이상으로 생명을 죽이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동물들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동물들이 인간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죽어나가고 있다. 과학기술과 인류의 발전에 희생되어가는 원숭이들, 화장품 연구에 사용되는 토끼들, 리얼 퍼 제품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들...
배부른 인간들의 무자비한 사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