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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Jun 09. 2016

그 코끼리가 죽었다

#일본살이|01

한국인 관광객도 자주 찾는 이노카시라 공원 한 켠에는 도쿄도가 운영하는 동물원이 있다.

그 동물원의 코끼리가 죽었다. 코리끼 우리 안은 코끼리 대신, 꽃다발로 가득차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처음 거기 동물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 도쿄에 동물원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를 데리고 여러번 가본 곳이다. 한 마리 헬쓱한 코끼리가 거기 있었다. 움푹 파인 눈. 그 눈이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 걱정이 되면서도 누구에게도 질문하지 못했다. '하나코'란 이름의 그 코끼리는 늘 거기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한 발자국도.


일본의 카프카라 불리우는 '아베 고보'의 소설 중에 '공공연한 비밀'에 아기 코끼리가 나온다. 어딘가에서 끌려와 그 목적을 달성하고 도시 한 켠에 버려진 코끼리. 순진한 아기 코끼리는 진흙탕 속에서 썪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기 코끼리는 배가 고프다. 도시의 잔인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이 모두 사라진 코끼리는 잊고 싶은 존재다. 결국 사람들은 코끼리에게 '먹이'란 명목으로 '썪는 것도 방지해준다'는 이유로 성냥을 던져주고, 성냥을 받아 먹던 코끼리는 누군가가 던진 불붙은 성냥에 의해 활활 타오르게 된다.


그 아기 코끼리처럼, 일본에 건너와 '전시', 그것도 '건강하고' '아름답고' '친근하게' 전시되는 목적을 달성한 늙은 코끼리는, 거죽만 남은 채 이노카시라 공원 동물원에 서 있었다. 조금도 유쾌한 풍경이 아니었다. 한숨만 나오는, 가슴이 턱 막히는, 그런 풍경 말이다.


그 코끼리가 죽었다. '하나코'라 불린 그 코끼리는 1947년 타이에서 태어나, 1949년 일본에 건너왔다. 우에노 동물원에 있다가 이동동물원의 일원으로 전국의 초등학교, 유치원 등을 돌며 아이들을 등에 태우는 묘기를 부리기도 했다. 자동차에 갇혀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던 코끼리는 그 스트레스로 탈주를 하기도 했고, 사육사와 취객을 밟아 죽이기도 했다. 무리를 지어 사는 코끼리에게 혼자를 강요하고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게 한 결과는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사람을 죽인 코끼리'. 코끼리는 동물원에 갇혀 버렸다. 사방이 콘트리트로 둘러싸인 동물원에서 그 코끼리는 쇠사슬에 묶인 채, 전시조차 되지 않고 갇혀버렸다. 우리는 모두 그 코끼리를 잊었거나 사람을 죽인 코끼리가 사형을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오만을 품고 있었다. 이노카시라 공원으로 옮겨 오면서 코끼리는 새 사육사를 만났고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던 중 이번에는 수의사를 코로 짓이겨, 다시 갇히게 된다. 콘트리트 벽 속에 갇혀 지내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보는 약간 넓은 곳에 전시되는 것. 어느쪽이든, 코끼리에게 부여된 삶은 다른 코끼리들과 넓은 풀밭은 뛰노는게 아니라, 좁은 공간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었다.

뒤늦게 알게된 코끼리의 삶은, 역시나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가슴이 메일 수 밖에 없는 스토리였다.

코끼리 우리 앞에서 사람들은 훌쩍였다. 코끼리의 죽음에 대한 애도만은 아니었다. 그 코끼리를 일본까지 데려와 전시한 것을, 묵인하고, 잊고 살아온 데 대한 어떤 후회, 그런 슬픔이었다.

  

동물원은 꼭 필요할까. 넓은 지구의 어딘가를 뛰어다니다 죽을 동물들을 작은 우리 안에 고독하게 가둬두는 곳. 교육적 목적을 둘러대기엔, 너무 많은 생명들을 인간의 이기로 인해, 뺴앗고 있는 건 아닐까. 코끼리는 행복했을까. 안전과 먹이란 명목으로, 말못하는 코끼리를 그저 전시되는 물건을 취급해도 되는 걸까. 코끼리는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이다. 그들은 발로 저주파수의 소리를 내고, 그 소리로 서로 이야기 한다. 부모가 된 코끼리는 아기 코끼리에게 자신들만의 말로, 위험에 대해 가르친다. 그런데 하나코는 홀로 떨어져 일본 전국을 돌며 전시되었다. 그리고 평생을 홀로 우리에 갇혀 살았다.


제2차대전 당시, 일본 전국의 동물원은 동물처분을 하게 된다. 맹수들이 혹시나 폭격받은 동물원을 탈주해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1943년 우에노 동물원은 사자, 코끼리, 표범, 독사 등등을 모두 죽였다. 전쟁이 끝나고 고도경제성장기이던 1970년대에는 인도와 타이에서 다시 코끼리를 입수했다. 코끼리는 일본이란 나라의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판다가 일본과 중국의 우호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동물원이 거기 있어서 간다, 우리가 동물원에 가야 동물들도 먹이를 먹고 살 수 있다는 변명은, 아무래도 좀 미심쩍다. 최근 일본에선 동물을 자연상태에 가까운 상태로 전시하는 동물원이 증가하고 있다. 자연상태에 가깝게 전시하는 건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잡아와 제멋대로 전시하고 즐기는 일이 언제까지 용서되야 하는 걸까.


하나코가 죽었다. 일본 신문들은 '죽었다'란 표현을 꺼리고 '눈을 감았다'는 단어를 골랐다. 거죽만 남은 빼빼 마른 늙은 코끼리, 도쿄의 한 동물원에서 친구도 없이 그저 죽음만을 기다려오던 코끼리가 죽었다. 그 무게는, 코끼리의 체중보다 수만배는 무겁게 받아들여야할 현실이다.


타이에서 태어나 일본에 건너온 코끼리가 죽었다. 코끼리는 69년을 일본에서 살았다.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꿨을까. 다른 코끼리를 만나보지 못하고, 평생을 홀로 살았던 코끼리가, 고독하게, 동물원 우리에게, 죽음만을 기다리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코끼리를 보냈다. 코끼리의 고독과 코끼리의 죽음에 공감한 수많은 사람들이 열 새로운 날들은 조금쯤 달라지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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