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da kim Sep 18. 2021

눈도 안 마주쳤는데 손부터 내미는 사람들

소극적 영업인의 언리미티드 에디션 부스 관찰기

2019년 11월 16일 토요일에 작성한 글입니다. 그 뒤로 2020년 1월에 해외 출장을 한 번 더 다녀왔는데요,이 글을 쓸 때만 해도 그것이 뜻밖의 마지막 출장이 될 줄은,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온라인으로 전환될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어제는 오후 반차를 내고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갔다. 2년 만이다. 주말에 갈까 생각하다가 그 때의 빡빡한 인파를 떠올리고 평일로 날짜를 바꿨다. 오픈 시간에서 고작 20분 지났을 뿐임에도 우산을 쓴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입장 팔찌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겪는다. 기다림.


어떤 면에서 나는 2년 동안 기다릴 일이 없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가지 않은 2년동안 7번의 출장을 겪었다. 모두 전시회 참가를 위해서였다. 출장 일정은 이렇다. 개최 1일 전, 전시회장에 간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우리 부스에 가서 짐을 풀고 목장갑을 끼고 수백개의 샘플을 진열한다(회사마다 다르다. 나는 늘 한시간 만에 모든 설치가 끝나는 다른 부스를 부러워했다). 다음날부터 4~5일간 그 곳은 나의 일터가 된다. 개장 30분 전, 입구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바이어들을 지나친다. 목에 걸린 Exhibitor 출입증을 직원에게 보여주며 손쉽게 들어간다. 테이블에 앉아 제품 가격을 다시 한 번 외우고, 기록용 부스 사진을 찍고, 메일함을 확인하고, 할 일이 없어지면 사장님이 사다준 커피를 마시며 방문객을 기다렸다.


어떤 면에서 업무의 일부는 기다림이었다.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다 보면 그들이 무심히 걸어온다. 그들이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 우리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떤 바이어는 제품 가격을 한 두번 묻고는 일 없다는듯 사라진다. 어떤 바이어는 조금 더 길게 부스에 머물러 이건 얼마냐, 저건 얼마냐, 공장은 어디에 있냐, 따위를 물었다.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메일 연락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그리고 다음 업체가 올 때까지 또 기다린다. 기다리다 보면 집에 갈 시간이 된다. B2B 전시회는 이렇다. 서플라이어도 바이어도 일을 하러 왔고 양념같은 스몰 토크(홍콩엔 언제 도착했니? 언제 돌아갈 예정이니?) 외에는 필요한 것만 묻고 답한다. 건조하기 짝이 없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작가들은 대부분 묻지도 않은 것을 나서서 설명했다. 부스에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그들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내가 한 손에 작품을 들고 엄지로 쓰다듬고 있으면 기획 의도나 본인들 작가 소개며, 작품 설명을 하곤 했다. 무료 스티커를 쥐어주거나 ‘천천히 보세요’ 라고 긴 머무름을 권유하기도 했다. 다른 부스에서는 소개가 필요 없는 유명 작가의 사인을 받으려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도 기꺼이 합류했다. 관객들은 부스에 빽빽하게 모여 있어서 그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뒤에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려야 했다. B2C 전시회의 열정이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만했으나 1, 2층을 오고가느라 불평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나도 소중한 반차를 소진하여 이 인파에 일조하지 않았는가.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발간한 출판사 ‘파시클’ 부스에 갔다. 세 권의 시집이 있었다. 나는 부스를 지키고 계신 여성분께 어떤 기준으로 시를 고르셨는지를 물었다. 어떤 책은 디킨슨의 대표 작품을 모은 것이고 어떤 것은 예술과 자연에 관한, 어떤 것은 여성 자아에 관한 시집이라고 한다. 나의 이 딱딱한 서술이 다 옮기지 못할 정도로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이었다. 친절하다 느낀 이유는 그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기 때문이며, 자세하다고 느낀 것은 그가 이 시집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 번역자이자 편집인이기 때문이었다! 1층을 한바퀴 돌고 다시 부스에 들러 여성 자아에 관한 시집을 샀다. 나는 충만한 기분과 지친 몸으로 귀가했다. 좋은 소비였다. 그렇게 느꼈다. 오랜만에 길고 달게 잤다.


10월 홍콩 전시회. 맞은 편 부스 사장님은 스몰 토크의 달인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니? 난 벨기에에서 왔어. 디자인은 벨기에에서 하는데 생산은 중국에서 해,... 블라블라. 언리밋 작가들과는 다른 내용이지만 그도 묻지도 않은 것을 먼저 말하고는 했다. 최소 바이링구얼인 그는 유연하게 불어와 영어로 언어를 교체했다. 바이어들은 우리 부스보다 더 길게 그에게 머물렀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우리는 부스를 봐주고는 했다. 혹은 꽤 친해 보였던 옆 부스 사장님이. 그를 보며 나는 영어를 더 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2020년 1월, 회사는 또 독일로 출장을 떠난다. 1분기 내로 퇴사할 계획은 없으니 나 또한 그 곳에 있을 것이다. 이 전시회는 업계 최대 규모라 그런지 개최 기간이 홍콩보다 하루 더 길다. 5일 동안 무얼 할 수 있을까? 영어 스피킹이 극적으로 좋아지거나 갑자기 성격이 바뀌어 벨기에 아저씨처럼 스몰 토크의 달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바이어에게 먼저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참관객이 되어 생각한 것.



매거진의 이전글 영국 워킹홀리데이, 원해서 왔는데 집에 가고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