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 - 길 위의 인연, 사람이 그리워지다.

‘잘 할 수 있을까?’ 란 말 하기도 전에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by 유영준

오늘 나는 걷는 걸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살다 보면

‘잘 할 수 있을까?’ 란 질문을 하기도 전에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많다.

오늘이 그랬다.

그럼에도 일어나서 걸을 수 있었던 것은

1. 본전이 아까워서 : 본전이랄 것도 없지만, 일단 시작하고 보니 이대로 끝내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뭔가 시작하기 전에 드는 생각들.

‘잘 할 수 있을까?’

‘중간에 그만두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괜한 짓 하는 건 아닐까?’

‘아직은 때가 좀 그런가? 나중에 상황이 더 좋아지면 하는게 낫지 않을까?’

‘준비가 덜 된 것 같은데…… 좀 더 준비를 잘 해놓고 하는게 좋지 않을까?’

이런 가지가지 생각들이 내 발길을 붙들어 매고, 내 성장을 멈추게 한다.


일단 시작해 놓고 보니, 생각처럼 금방 포기해지지는 않는다. 작심 3일이란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네. 일단 시작하면 3일 정도는 갈 수 있다는 의미겠지.


2. 북쪽 끝인 고성통일전망대를 오늘 도착할 수 있다는 목표가 있어서.

동해안 북쪽 끝이 고성통일전망대다. 속초부터 시작했지만 왠지 끝 지점을 간다는 느낌이 날 자극했다. 만약 강릉부터 시작해서 1~2일 더 걸어야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면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초 단기 목표가 기대감을 갖고 하루를 출발하게 해 준다. 그래서 난 초단기 목표가 좋다. 고지가 보이니까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버스를 타고 어제 캄캄한 밤중에 마무리 했던 지점으로 이동하는데

‘내가 저 길을 다 걸어서 갔나?’ 라는 감회가 든다. 내 다리가 특별히 기특하다.

버스에서 내려서 네이버 지도로 검색한 길을 따라 걷는다. 이럴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 생각없이 그냥 하는 거다. 생각이 많아지면 좋은 생각보다는 안 좋은 생각이 더 많이 생긴다.

명태의 고장 거진에 들어서면서 푯말에 써 놓은 글씨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거진 좋은글 연인.jpg
거진 좋은글 가족.jpg

“여보 사랑해” “우리 가족 최고” “걱정 말아요. 그대”

이어서

“영원히 사랑해” “대박” “내 아를 낳아도”

푯말이 이어진다.

저절로 웃음짓게 만드는 글귀인데……왠지 모를 씁쓸함. 이 말들을 주고 받을 사람이 없으니…

담벼락에는 명태의 다양한 이름이, 생김새와 함께 적혀있다.

명태의 다양한 이름.jpg

생태, 동태, 코다리, 노가리, 북어, 황태……

‘명태야, 너의 정체성이 뭐냐?’

하긴 명태는 가만히 있는데 사람이 갖다 붙인 이름이지.

나는 몇 가지로 불릴까? 어떤 것이 나한테 가장 어울릴까? 잘 모르겠다. 딱히 마음에 확 와 닿을만큼 자랑스러운 것도 아직은…

거진항을 지나면서 옛스런 풍경이 스친다.

잡아 온 물고기를 선별하는 공동 작업장 옆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분을 보니 세월이 멈춘 듯한 그림이 보인다.

흑백 자전거와 시장.jpg
흑백 어구손질.jpg

산하고 맞닥뜨린다.

‘이 산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으려나……’

논을 지나고, 모래해변도 지나고, 조그만 도시를 지나고, 바다도 지나서, 이제 산하고 만났다.

이런 변화가 기분 좋다. 눈이 지루하지가 않으니 마음도 지루하지 않다.

내 다리만 지루함을 느낀다.

산 등성이를 타고 혼자 걷다 보니 어제 해 떨어지고 걷던 소나무 숲 초소길이 떠오른다. 날만 환했지 어제와 비슷한 분위기다.

산길을 혼자 걷다가 제일 무서운 건 산짐승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거다.

나 같은 사람이 반대편에서 걸어 온다면 왠지 긴장될 것 같은 상황이다.

다행히 몇 시간 동안 사람 하나 못 만났다. 곰도 못 만났다. 새만 몇 마리…

산을 넘어서니 화진포로 가는 길로 이어진다.

어렸을 적 김일성 별장 있는 곳이란 얘기를 들었던 곳인데 아주 넓은 호수다.

화진포 입구에서 초코파이, 사과, 물을 마신다.

사실 난 이미 이쯤에서 체력이 바닥났다. 발바닥도 너덜너덜 하고, 허벅지에서는 쥐가 날 조짐이 보인다. 아직 점심을 먹기도 전인데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래도 여기에서는 어떻게 방법이 없다. 돌아갈 수도 없고, 체력이 방전되니 생각도 멈춘다.

이제 생각은 오직 한 가지에 초 집중된다.

점심! 맛있는 점심! 맛있는 반찬!

그래 점심은 실패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화진포를 벗어날 즈음에 초도항이란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드디어 식당에 들어갈 수 있다.

엄청 신중해진다. 세상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오늘 점심을 완벽하게 먹어야 한다.는 집념.

마을 초입에 있는 백반집을 지나면서 유혹을 느꼈다. 맛집처럼 보이는 포스가 느껴진다. 아직 상대패를 보지도 않고 결정을 내릴 수는 없지. 더 가보자. 질질질질…내 다리……

더 괜찮아 보이는 집이 있을거란 기대감으로 70~80미터 정도 걸었다. 작은 마을에서 이 정도 거리는 거의 마을을 관통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없다. 나의 관심과 침샘을 잡아 당기는 집이 없다.

이렇게 배고플 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을 건네는 중국집 냄새 말고는 없다. 이제는 정말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느낌이 들고, 뇌도 분리된 것 같다. 각자 자기들 것만 챙긴다. 다리는 안 움직이려고 하고, 두뇌는 먹을 것만 생각만 한다.

질질질 끌겨 가고 있는 다리를 보며, 면이 아닌 밥이어야 한다는 결심을 한다.

그냥 밥이 아니라 다양한 반찬이 있는 밥이어야 한다. 색깔도 다양해야 한다. 녹색, 갈색, 빨강색, 노랑색, 검은색, 흰색 다 들어가 있는 밥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지나온 길을……처음 날 유혹한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 70미터, 그렇게 돌아가기 싫은 80미터는 처음이었다.

몸 상태가 이렇다 보니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엄청나게 멀리 느껴진다.

그래도 머리속에 맴도는 밥에 대한 집념이 다시 발길을 돌리게 만든다.

식당에 들어가자 마자 백반을 주문하고 양말을 다 벗는다.

양말은 두 겹이다. 바세린을 바른 다음 발가락 양말을 신고, 그 위에 등산 양말을 덧 신었다.

물집이 안 잡히게 하는 방법인데 발가락 양말 신는 게 엄청 불편하다. 발가락을 끼워 맞추기가 장갑하고는 상대도 안된다. 구멍 하나에 자꾸 발가락이 두 개씩 들어간다. 하나 빼면 다음 칸에 다시 두개가 들어가려고 한다. 제어가 잘 안된다. 뇌에서 멀리 떨어진 신체라 그런가?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밥 나오기 전까지 식당에 누웠다.

‘아, 세상 편하다. 그냥 여기서 낮잠 한 숨 때리고 싶다’

배달 주문이 한 건 있고, 손님은 나 뿐이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반찬이 깔린다.

눈도 빛나고, 손도 힘이 생기고, 생기가 돈다. 오직 다리만 흐늘거리며 힘이 없다.

밥, 국, 반찬 거의 다 비웠다. 거지 같이 먹었다. 실제 내 상태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다행히 점심을 먹고 나니 힘이 조금 난다. 잠시 쉬어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초도항을 지나고 대진항을 지난다. 어촌 마을인데 참 예쁘다.

대진항 해상공원.jpg

차를 타고 고성통일전망대를 간다면 이 마을들 속살까지 들여다 볼 수 없었을거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이 마을들도 자세히 보며 다니니 기적처럼 예쁘다.

파란 바다 색깔과 구별되는 동네 색깔, 마을벽에 써 놓은 글귀와 그림, 느릿한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

정말 예쁘다.

멀리 마차진리가 보인다. 버스 종점이다. 대중교통을 타고 갈 수 있는 마지막 종점이다.

북쪽버스종점 마차진리.jpg

어찌나 반갑던지.

‘저기를 지나면 이제 고성통일전망대구나’

목표점이 보이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미 다리는 감각이 둔해져서 아프거나 말거나 그런가보다 하고 있다.

고성통일전망대 출입사무소.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다. 여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가기 위해서는 출입신고서를 작성하고 차를 가지고 이동해야 한다. 즉, 차가 없으면 통일전망대를 갈 수 없다는 말이다.

셔틀 버스라도 있을만 한데 없다.

‘그래, 동해안 종주 끝나고 나서 나중에 차가지고 다시 오자’란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호떡 냄새가 날 자극한다. 호떡은 언제나 지나칠 수 없다. 두툼하니 녹색에 꿀까지 가득한 호떡. 하나 사서 컵에 담아 물어 뜯는다. 이걸로도 충분히 행복한 느낌.

옆에서 같이 호떡을 사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내게 말을 건다.

“저, 괜찮으면 우리랑 통일 전망대 들어갈래요? 차가 좁긴한데요”

“네? 아, 고맙습니다.”

‘우와, 어찌 사양하겠어요’

그 분은 안에서 내가 차가 없어서 못 간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다시 들어가서 신고하고, 아주머니와 아들이 동행한 코란도를 타고 이동한다.

철책너머 북한 초소가 보인다. 해변과 바다가 쭉 이어져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색다른 풍경이다.

통일전망대에서 본 북한.jpg
통일전망대 부처님 성모마리아상.jpg

출입사무소에서 발길을 돌릴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오게 된 인연이 생겼다.

살아 오면서 내가 계속 살 수 있게 만들어 준 인연들처럼,

우리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인연들로 이어진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했다. 대학은 나중에 필요하면 간다고 한다. 에어컨 설치와 같은 공조 일을 하는데, 생각하는 것도, 엄마를 대하는 것도 엄지 척 할 만큼 멋지다.

어머니는 아들이 어렸을 적에 헤어지고, 속초로 와서 몇 년 째 살고 계신다. 서울에 사는 아들과의 약속 중 하나는 방학마다 함께 한다는 것이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이 모두 노력해야 지킬 수 있는 약속이다. 왠지 애틋함이 있다고 느껴졌는데 이유를 알 것 같다. 방학은 아니지만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서 어머니와 며칠 시간을 보내러 온 것이다.

통일전망대를 내려와서 나를 속초에까지 태워 주신다고 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들에게 좋은 얘기 해줘서 고맙다는 어머니지만,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감동을 받았다.

두 사람을 보며 갑자기 사람이 그리워진다. 찾아가고 싶은 사람, 찾아왔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사람들은 알까?

3일만에 속초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걸었다.

3일 아니라 30일은 된 듯한 생각이 든다.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좋은 분들 만나서 생각보다 빨리 숙소에 도착했다.

씻고, 식사를 했다.

침대에서 잠시 쉬다 보니 해안가 야경이 보고 싶어졌다. 동명항쪽으로 내려가서 아바이 마을을 끼고 만들어진 금강대교와 설악대교를 건너서 계속 걸었다. 다리 위에서 바다쪽을 바라보고, 다시 속초 시내쪽을 바라본다. 이 풍경을 혼자 보고 있으려니 행복함 보다는 그리움 같은 것이 밀려온다.

다름의 동행 함께 멀리.jpg

생각없이 계속 걷다 보니 어느 덧 속초 외곽까지 오게 됐다.

도시라 이 늦은 시간에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다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은 양양을 넘어서 가겠구나.

3일이 지나니 조금은 무덤덤해진다.

잘할까 못할까? 힘들까 괜찮을까? 이런 생각들이 확 줄어든다.

‘그래 오늘 하루 수고했다.’

왠지 잠이 잘 오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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