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 바닷가 마실 나갔다가 호러 찍었다 이놈의 못

이놈의 못된 습성은 허리가 작살나도 고치질 못하는건가? 인생의 템포 조절

by 유영준


둘째날 아침 일찍. 시내버스에 올랐다.

어제처럼 불안하지는 않았다. 일단, 허리나 다리에 이상이 없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이른 시간이라 버스에 앉아서 갈 수 있다. 학생들이 많다. 이른 아침 버스안에서 나만 유일하게 한가하고 세월 좋은 사람 같다.

‘가벼운 옷차림에, 등산모자, 스틱, 작은 배낭, 선글라스…평일에 여행이나 다닐만큼 여유로운 사람처럼 보이겠지?’

살면서 가끔 어이없는 일에 창피한 느낌도 들 때가 있다. 잘못한 것도 없고,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그런 기분이 든다.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어서 그런가?

다들 빨간 옷 입고 있는데, 나만 파란 옷 입고 모른체하고 앉아 있는 느낌이다.

어제 마무리 한 청간정에 도착했다.

청간정에서 바라본 철책1.jpg

‘자, 이제 또 하루가 시작이구나. 근데 오늘은 왜 마음이 가볍지?’

어제의 무거웠던 기분에 비하면 하루만에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됐다.

‘대전에서 처음 출발할 때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이 조금은 가셔서 그런가?’

‘한치 앞도 모르는게 인생’이라는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오늘이 어떻게 끝날지 미리 알았더라면 10월 24일을 삭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바닷가 길이 해안으로, 다시 조그만 산으로 이어진다. 중간 중간 군인 초소도 나타난다. 늘어서 있는 철책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기도 하고, 어제처럼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역할을 하는 철책도 지난다.

열린 철책.jpg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부부가 나타났다. 갓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피크닉 박스를 가지고 왔다. 제대로 된 사진 촬영 장비도 챙겨 나왔다.

요즘에는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풍경이 부러워지고 있다.

가까이 가서 “참, 부럽습니다.”라고 말하면,

‘미친건가?’

라며 황당해 할 게 뻔하다.

좀 떨어진 곳에 가서 들락날락하는 바닷물을 영상에 담았다.

물이 너무 투명하고 깨끗해서,

쏴~아~~~.

쏴~아~~~(뭘 쏴?)

하는 소리가 너무 예뻐서.

보이지 않는데도, 들리기만 하는 소리인데도

‘예쁘다아아아아아~!’ 란 말이 나온다.

오래전 치앙마이에서 조금 떨어진 ‘빠이’의 개울가에 앉아서 맞았던 바람 소리도 그랬다.

그때만 해도 치앙마이에서 고산 트래킹을 하며 뛰어다녔는데, 이젠 새색시처럼 조심조심, 사뿐사뿐 걷는다. 돌에라도 걸려서 넘어질까봐…

바닷가를 걷다가 다시 내륙쪽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송지호라는 호수를 끼고 걷는다.

도시에서 이 정도 호수라면 거의 인공 호수 같은 느낌으로 바꿔져 있었을텐데, 여기서는 그냥 늪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 손을 타지 않았다.

송지호.jpg

호수 주변이 온통 나무들로 우거져 있고, 가끔씩 산책하는 사람들을 위한 돌의자가 놓여있다.

전에는 이런 의자의 존재감이 없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 마냥 무심코 지나다녔다.

오늘부터는 아니다. 너는 그냥 돌멩이가 아니라 나의 침대고, 집이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쉬지 않으면 그날 일정은 물 건너 갈 위험이 높다. 다치기 전에, 탈 나기 전에 조심해야지 일단 망가지면 서러워지는 인생이 된다.

‘쉬어야지, 좀 더 갈 수 있어도 쉬자. 이 미련아”

배낭 벗어 놓고, 돌 의자에 길게 누워 모자로 얼굴을 가린다.

‘고성군수님! 고맙습니다. 잘 쉴께요’

가끔 5분, 10분 이런식으로 꿀잠에 빠질때가 있다.

시골 길로 들어서는데 길게 늘어선 내 그림자가 반갑다.

이러다가 나중에 귀신도 반가울라.

사실 지금까지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러다보니 고양이처럼 된다. 자기 그림자 가지고 팔딱 팔딱 뛰어 다니는 고양이처럼, 내 그림자가 신기해서 한장 찍는다.

그림자.jpg

아직까지는 강원도 고양이가 나보다 좀 나은 듯 하다.

잡은 지 얼마 안되는 줄돔인지 뭔지를 1냥이 1돔씩 해치우고 있다.

해안가 고양이 간식.jpg

오늘 코스는 걷기의 뷔페 같은거다.

바닷가, 호숫가, 논길을 걷는다. 공사중인 도로를 만나고, 냄새가 코를 찌르는 축사도 지난다.

‘이제 산길마저 나오는구나.’

폐품을 활용해서 아기자기한 작품들을 만들어 놓았다.

‘누구 보라고 만들어 놓았을까? 그랬을리는 없겠지’

나름 꽤 작품 느낌이 난다.

시골집 폐품조각.jpg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맞는 걸까?

맨날 허리 뽀개지게 일하시다가 겨우 하나씩 만들어서 놓은 건 아닐까?

추측을 말자. 내가 보기에 멋지고, 낭만적으로 보여도, 저 분들에게는 뺨 맞을 생각일지도 모르니까.

내가 할 거라고는 북으로, 북으로 계속 걷는 일 밖에 없기에 사소한 거에도 생각이 폭죽처럼 일어난다.

생각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번 걷기에서 특히 깨달았다.

‘전봇대 한 칸만큼만이라도 아무 생각없이 걸어보자’라고 결심하고,

시~~작 하면, ‘작’이 끝나기도 전에 뭔가 생각의 발단이 일어난다.

생각이 걱정을 만들고, 걱정이 걱정을 만들고, 쌓인 걱정이 병을 만들고, 그렇게 하나씩 늘어간 병(술병도 같은 속도로 쌓여갔다)들이 모여져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누가 그랬지?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내가 지금 걱정이 없겠다”

간성 시내를 살짝 못 미쳐서 다시 시골길로 들어서고, 거기서 집인지, 미술관인지, 그 자체가 예술품인지 모를 곳을 지나간다.

큰소리로웃자.jpg

너무 피곤하고, 다리도 무리를 해서 그런지 질질 끌며 걷는다. 배낭에 있는 물 꺼내 마시기는

커녕, 잠시 쉬면서 배낭 내려놓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매고 쉰다.

물도 귀찮아서 안 마시고 있는데, 사진은 안 찍고 못 배기겠다.

이 집 주인은 대단한 사람이다. ;

“사진 한 장 찍어가세요”란 말을 안 해도 알아서 사진을 찍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이 분이야말로 진정한 동기부여 명강사다. 내 피곤함을 잠시 내려놓게 하고, 써 놓은 글도 작품이다.

쫄지마 손잡아줄께요.jpg

‘덕분에 기분 좋아졌스~’ 갑자기 힘이 나는 듯 하다.

아주 아주 아주 잠시…

잠시도 아닌가? 힘이 나는 것 같다는 건 어쩌면 착각이었던 것 같다.

대략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할 정도…만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놀랍다. 잠시 기분이 좋아졌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괜찮아진 느낌이다.


몸은 여전히 천근 만근이다. 논길을 넘어서 바닷가쪽으로 간다.

그리고 바닷가에 다다라서 나를 향한 저주를 내 뿜는다. 오늘 하루 열심히 걷기만 한 내게 욕을 파도만큼 쓸어다 준다.

‘이런 C x x x,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면 x x x x x. 집이 예쁘면 뭐 x x x’

이때 당시 몸이 완전히 피곤에 쩔고, 다리도 거의 질질질 끌고 걷고 있던터라 나 자신한테 무슨 말을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이 날 내가 최초로 말을 한 것이 이때쯤 이었을 거다.

분노나 놀람이 불러 온 기적?

그 이유는 지금까지 걸어 온 길에서 종종 만났던 상황과 비슷했다.

개천이 산에서 마을로, 다시 바다로 이어져 있어 길이 끊긴다. 그렇다면 내륙쪽으로 계속 들어와서 다리가 있는 곳까지 가야한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 다시 바닷가로 걸어 내려온다. U 턴 형태의 걷기가 된다. 대략 이렇게 걸은 시간이 1시간 30분 정도다. 만약 아침이나 점심 먹고 나서 바로 이런 상황이 됐으면

‘허허, 내가 또 바보짓을 했네. 그럴수도 있지 머’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난 그럴 일이 없다. 그게 아침이건 점심이건, 저녁이건 상관없이 욕을 해댔을 확률이 95%는 넘을 것 같다.

더구나 이때는 완전히 지쳐 있어서 10분 아니 5분이라도 더 돌아간다는 건 설악산 울산바위 올라가는 것 만큼이나 심각하게 느껴지던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돌아서 바닷가에 도착했는데 U자가 아니었다. U자 끝에 벌어져 있는 곳이 철책 다리가 놓여 있었다. 사실 돌아오기 전에 직진해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다리가 둑길과 평평하게 놓여 있어서 멀리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고민했지만 거기에 다리가 없는 쪽에 베팅한거다. 만약 거기까지 갔다가 다리가 없으면 15분이나 손해보는 건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싫었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다?’ 이럴 때 써먹을 수 있는 속담인가?

뭔가 어색하지만 뇌에서 이 정도면 막 무식해 보일 정도는 아니라고 그냥 쓰란다. (나중에 보니 막 무식해 보였다. 그래도 그냥 둔다.)

이왕 돌아왔으니 이젠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다리가 있건 없건 나에겐 달라질 것도 없는데, 왠지 억울하고 분했다.

나 자신한테 욕하는 건 내가 아닌 다른 자아 같은 느낌~!

스스로에게 찰 진 욕 해대고 나니 조금 포기가 된다.

여기서 또 실수를 했다.

아마도 지친데다가 스스로에게 욕도 실컷 얻어먹어서 상황 판단이 안 됐나 보다.

바로 숲길로 이어진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줄만 알았고, 숲길도 그리 길지 않아 보였다.

그 숲길 중간에서 갑자기 어두워졌다.

내 느낌은 해가 진 것이 아니라, 해가 실종된 것이다.

‘갑자기 해가 사라졌어’

어두운 숲길에서 걱정은 딱 하나다.

곳곳에 군인 초소가 있는데 지금도 순찰을 도는 곳 같았다.

이 밤에 등산모는 꼭 해병대 모자처럼 보이고, 배낭 하나 매고 시커먼 곳에서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걸 보면 나라도 총을 쏘고 싶을 것 같다.

총을 맞기 싫어서,

‘누군가의 인생에 민폐를 끼칠 수는 없잖아’ 라고 핑계되면서…

절룩거리며 다리를 질질 끌고 겨우 겨우 걷던 내가 달라졌다.

좀 전에 스스로에게 욕먹던 내가 아니다.

여전히 절룩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절룩이면서 어떻게 저렇게 빨리 걸을 수 있지?’

라고 의아해할 만큼 롤러스케이드 미끄러지듯 스르륵 스르륵 걸었다.

나는 이때 확실한 목표 의식이 있었다.

‘군인에게 발견되지 말자. 암구호 같은거 물어보게 하지 말자. 내일 신문에 나오지 말자’

그래서 이성을 반정도 상실한 상태로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었다.

‘뭔가에 미친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이럴 때 써먹으라고 만든 건 아니지만 확실히 맞는 말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숲에서 벗어나자 어둠속에서 달이 휘황차게 나타났다.

숲 길을 나는 듯, 달리는 듯, 걸었던 이 시간이

오늘 중 처음으로 머리에서 생각을 지운 순간이었다.

‘생각을 하지 말자’라고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결국 어이없게 해냈다.

군인 초소와 어두운 숲, 나의 빈약한 상상력이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다시 논길.

이제 집에 가야하는데 가로등인지, 민가 불빛인지 너무 멀게 보인다.

일단 그 불빛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

논길을 걷다 보니 달빛에 비춰 보이는 모습이 에펠탑만큼이나 독특한 다리가 나타난다. 이제 총 맞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인가?

배낭을 내려놓고, 물도 한 모금 마시고 다리를 한 컷 찍는다.

아름다움은 본능처럼 사람을 잡아 끄는 힘이 있다.

어둠속의 북천철교.jpg

오늘이 보름인가? 유난히 크고 밝은 달 아래서 이제는 자포자기 한 심정으로 걷는데 드디어 차 다니는 길이 보인다.

‘살았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참 신기한 게, 도로까지 금방일 것 같았는데, 5분도 안 될 것 같았는데…30분 넘게 걸어야 했다.

어렸을 때 듣던 도깨비 이야기가 생각난다. 도깨비한테 홀려서 바로 옆에 있는 거리를 밤새 걸어서 갔다는 이야기.

‘희망’이 이렇게 대단한 거다. 뇌만 빼고 다 마취된 것 마냥 이제 힘든 것도, 다리가 아픈 것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저기야, 저기까지만 가면 되’

심지어 마지막에는 절룩이면서 뛰기까지 했다. 버스 놓치면 다시는 안 올 것 같은 절실함 때문에.

절실함이 사무쳐서 목까지 올라왔고, 이성을 잃게 만들었나보다.

난 그렇게 버스에 무사히 안착했다.

승객이 5명 밖에 없다. 혹시 이 분들 놀라지 않았나 모르겠다.

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은 30분이 넘게 걸렸다.

‘오늘은 워밍업 하듯이 해보자’라면서 시작했던 산뜻한 출발이, 마무리는 호러로 끝날뻔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숙소로 걷는데 길가 커피숍 창턱에 고양이 한 마리가 턱하니 앉아있다. 처음에는 조각품인 줄 알았는데, 살아있다.

‘고양아 너 조차도 예쁘구나. 그래 오늘은 예쁜 것들 많이 만난 하루였다. 예쁜 것들에 홀리지 말아야지.’

카페와 고양이.jpg

버스타고 출발해서 다시 돌아 올 때까지 12시간 넘게 걸렸다. 30킬로가 넘게 걸었다.

오늘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냥 이런 날은 묵묵부답!

나의 미련함이 달보다도 더 휘황찬란하게 빛났던 하루였다.

소주 한 잔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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