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걷기 첫날 - 두려워서 쉴 수 없었다. 포기할까봐
자주 그래왔다.
준비하고 또 준비하면서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다른 일들을 걱정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말았던 일들이 한 두 번이던가.
오늘은 그런 면에서 좀 다른 출발이었다.
가능한 생각을 적게 하고, 굳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도 않고, 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20개월만에 전혀 다른 하루를 보내게 됐다.
연결고리 같은 게 있어서 그것을 특별하게 끊어내지 않으면 그 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날들이 오래되고, 어느 시점에서 멈추지 않으면 이젠 더 이상 새롭게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심각해진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다.
그냥 오늘 시작한 하루가, 이 길이 끝날 때 쯤이면, 그냥 시작한 하루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속초에서 고성으로 넘어가다 보면 해파랑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내리막길을 돌면 ‘바다정원’이라는 브레드카페가 나온다. 이미 소문이 자자해서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많다. 아름다운 건물과 훤하게 열린 바다는 철책으로 가로막혀 있다. 낮에만 잠깐 철책 출입문 한쪽을 개방해준다.
이 문을 통과해야만 바닷가에 나가고 들어올 수 있다. 언젠가는 이 철책이 철거되지 않은 체로 남아서 관광상품이 되는 날이 있을까? 이 철책이 쭉 이어진 길은 군 관계자 외에는 거의 걷지 않는 듯 보였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어서 철책을 따라 숲길로 걸음을 옮겼다.
길 따라 동영상을 찍으면서도 ‘이런 동영상이 문제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계속 올라가봤다. 숲길과 맞닿아 있어서 철책이 주는 위압감만 아니면 정말 예쁜 길이다.
한참을 걷다가 특별한 길을 만났다. 철책 길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처음에는 천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길이 끝난 줄 알았다.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육지 쪽으로 바라보니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버스에 앉아 있는 것도 나에게는 힘든 일인데 4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와서, 쉬지 않고 걷다 보니 다리에 피곤함도 몰려온다.
‘그래, 생각을 말자. 생각하면 더 힘들어져. 그냥 걷자’
육지 쪽으로 절룩거리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철책 안쪽으로 통로가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런 경험을 한다.
‘생각’이 나를 사람이게 하지만, ‘생각 없음’이 오늘 나를 살리고 있다.
이 길을 발견한 건 오늘의 행운이다. 정말 특별한 느낌이다. 사람이 다닌 흔적도 거의 없고 갈매기 배설물만 곳곳에 묻어 있다.
차를 타고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만날 수 없는 인연.
굳이 이 길을 다닐 이유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조차도 길을 잘 못 들어 후회를 하고 있던 찰나였다.
‘이 길을 못 만났더라면……알지도 못해서 후회할 일도 없겠지만, 이런 뭉클함도 없었겠지’
사는 것도 그런가? 알던 길로만, 알던 일만, 알던 사람만……그렇게 걸어왔나?
애초에 사람이 거의 안 다니는 길이라 벗어나는 것도 힘들었지만 놓치면 아까울 길이다.
걷고, 걷고, 걷다 보니 철책이 없는 해안가도 나온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고, 길도 없는 갈대밭 사이를 겁없이 헤쳐간다. 결국 청간정 입구까지 오게 됐다. 갑자기 너무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이러다 탈이 났다. 의식하지 않으면 쉬지도 못하고, 멈추지도 못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다가 다치고, 부서지고, 잃게 된다. 더 욕심 부리면 부상을 입을 것 같은 생각에 속초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길을 걷다 보면 안 보이던 것을 보게 되고, 못 느끼던 것을 느끼게 된다. 2시간 30분 걸어온 길을 버스는 12분만에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왠지 손해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버스 기사분이 엄청 친절하시다.
버스에 올라타면서 속초시외버스터미널 간다고 미리 말해 두었다.
도착하기 바로 전에
“손님, 이제 벨을 누르세요” 라고 알려주신다.
어떻든 버스는 벨을 눌러야 서니까......
샤워를 하고, 양말과 속옷을 빨아 널고 나니, 오늘 하루가 새삼 길게 느껴진다.
아직도 내일을 자신있게 시작할만큼의 용기는 나지 않는다.
‘내일은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데……계속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오는 찰나, 생각을 지우기로 했다.
‘생각 없음’을 연습해야만 이 길을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