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09.
바닷가에 재미를 붙인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도 해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전용 풀이 딸린 리조트에서 수영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했건만 도로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급 리조트들을 눈으로만 지나치는 것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우리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 가서 수영할까?"
"이왕이면 이 동네에서 제일 좋은... 음... 오리엔탈 리조트에 가 볼까?"
"정말?"
"그럼! 우린 백패커니까!~"
언제부턴가 그들은 심상치 않은 도전 앞에 "우린 백패커니까!~"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아들이 은연중에 그렇게 외쳤는데 그때마다 흥겨워했다. 그도 입버릇처럼 외쳤지만 그럴 때마다 아들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아빠, 거기 들어갈 수 있어? 우리는 못 들어가잖아"
"괜찮아~ 서로 와서 놀라고 만들어 놓은 수영장인데 뭐~ 수영 좀 하면 어때. 그리고 우리는 백패커니까!~"
"음... 그래도... 우리는 거기 묵고 있지도 않잖아?"
"아 참, 나, 괜찮테도~ 우린~ 백패커니까!~"
아이는 아빠의 이런 태도가 미심쩍고 못 미더웠다. 그래서인지 스쿠터를 타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자신 없어했다. 달리는 내내 되돌아가자고 뒷자리에서 외치고 있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선 그는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고는 여유롭고 품격 있은 투숙객의 보행을 아들에게 주문했다. 웃통을 벗은 채 로비를 슬쩍 지나치고 나니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풀장이 훤히 드러났다. 수정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이든 서양 투숙객들은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고 젊은 커플들은 풀 위에 반쯤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새로운 진입자를 은근슬쩍 눈 여겨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는 우선 샤워기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씻어야지, 먼저"
여전히 가슴 졸여하는 아들은 발꿈치를 들고 아빠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마치 이 수영장의 주인이라도 된 양 물속에 몸을 담갔다. 뒤따라 들어온 아이는 그와는 달랐다. 아무래도 티가 났다.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거의 발광하기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창문도 없고 햇빛도 안 드는 동굴 같은 숙소에서 비까번쩍 번드르르한 궁전에 오니 신나는 게 당연하겠지만 아무래도 이건 거의 발광 수준이었다. 표시 내지 말라는 그의 눈빛은 엄중했지만 느긋했다.
수영장을 유유히 평정한 그들은 해변으로 이어진 연결로를 따라나가 그곳에서도 수영을 즐겼다. 캐노피 침대가 줄지어 깔린 해변가에서 한참을 즐기다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미리 예약한 달랏행 버스를 타기까지는 두어 시간 정도 남아 있었고 스쿠터에 기름은 절반 이상 꽉 차 있었다. 숙소에서 간단히 씻고 짐만 챙겨서 나오면 되는 터라 그는 기름을 다 쓸 요량으로 남은 시간을 더 달려보기로 했다. 마을 어귀를 잠시 달렸지만 기름은 줄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흰모래사막으로 달리기로 했다.
신나게 달리는 중에 한 현지인이 뒤에서 따라붙더니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표시하고 있었다.
'뭐지? 속도를 낮추라는 건가?'
'아~, 그렇지. 학교가 있었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 바닥에 표시가 있지. 40km'
다시 오토바이가 옆 서거니 달리면서 손가락으로 또 한 번 40이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40. 그래. 40. 나도 안다고. 그렇게 달리는데?'
하지만 현지인은 그의 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학교를 훨씬 지나친 후에도 손가락으로 자기 두 눈을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뭐지?'
아니나 다를까! 폴리스!!!
불현듯 나타난 기동경찰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경찰은 먼저 그를 내려 세우고 국적을 묻고 면허증을 보자고 했다. 앞선 오토바이에선 서양 커플이 뭔가를 어색하게 건 내고 있는 것이 포착됐다.
"드라이브 라이선스"
"드라이브 라이선스?"
"예쓰, 드라이브 라이선스!"
'면허증이라니. 무슨 면허증. 웬 면허증~'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노! 드라이브 라이선스"
경찰이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먼 산을 은근슬쩍 바라보더니 문서 하나를 척 들이밀었다. 문서는 비닐로 코팅되어 있었고 한글로 번역까지 해둔 교통법규가 적혀 있었다. 내용인 즉 베트남에서 면허증 없이 운전할 경우 최고 800,000VD에서 1,300,000VD까지 벌금을 내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악명 높은 현지 경찰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날벼락처럼 날아들 줄이야. 게다가 지금쯤은 숙소로 돌아가야 버스를 제시간에 탈 빠듯한 시간대였다. 긴박하게 맞닥트린 상황에 그는 폭발할 것 같았다. 이 난국에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랬다. 빠른 두뇌 회전과 임기응변에 필요한 필름이 사정없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적절한 대사는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만 복잡했다.
그는 일단 목에 힘을 주고 영어로 조리 있게 말을 꺼냈다.
"베트남과 한국, 양국 간의 조약에 따르면 스쿠터는 면허증 소지가 필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직 150cc 이상 오토바이만 면허가 필요하다."
그들은 그의 말을 다 듣고 또박또박 영어로 되돌렸다.
"베트남 법에 따르면 운전 면허증이 필요하다!"
강경했다. 순간 이 협상이 쉽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곧장 전략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내가 다름 아니라 한국 대사관 직원인데~ 이럴 경우, 오토바이 면허증은 필요 없다고 알고 있다. 필요하면 대사관에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보자!"
마찬가지로 헛 대답이 돌아왔다.
"베트남 법에 따르면 운전 면허증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대사는 동일했다.
"내가 대사관 직원이라니까!"
"베트남 법에 따르면 운전 면허증이 필요하다~"
"내가 대사관 직원이라니까!"
그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베트남 법에 따르면 운전 면허증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목소리 톤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의 굳건한 정신과 태도로 인해 대사관 직책은 슬그머니 사라져야 할 것만 같았다. 그들의 변치 않는 비웃음 앞에 대사관 직원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설령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이라 한들 영 통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찰나의 고민 끝에 그는 만민 공통어인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었다.
"헬로~ 아임 쏘 쏘리~ 위 해프 투 컴백~"
"위 해브 투 테이크 더 플라이트 투 어클락 투 컴백 홈"
"룩 앳 디스. 위 해브 노 머니. 쏘리~ 노 머니. 쏘~ 쏘리"
"플리스~ 위 해브 노 머니~"
사실 그의 지갑은 운전석 아래 박스 통 속에 있었다. 반바지 차림에 아무것도 가진게 없다는 시늉을 하며 두 손으로는 만두 빚는 동작을 황급히 취하고 있었다. 고개 또한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애절한 표정을 연출하고 있었다. 심문하던 현지 경찰이 순간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뭔가 봐주려는 기미가 흘러나왔다.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경찰은 길 건너편 다른 동료를 손짓하며 불렀다.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네가 좀 어떻게 해보라"며 눈빛을 바꿨다. 자기는 그냥 보내주고 싶지만 그래도 왠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그의 동료가 맞은편에서 건너왔다. 몸집이 크진 않았지만 마치 터미네이터가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척하니 경례를 했다. 이번에는 독일군 같았다.
길고 긴 심문이 재차 시작되었다. 그는 망연자실했다. 마수걸이에 걸린 것 같았다.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대략 난감했다. 적절히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래, 재수?'
'운명?'
'인과응보? 심판? 죄?'
슬펐다.
'까불대더니 잘됐다~'
자기 마음이 신나게 비웃고 있었다. 울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질퍽한 늪에서 빠져나올지 제발 좀 살려달라고 신음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만 나오면 앞으로 남은 일생은 무엇이든 하겠노라는 공약을 남발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정말로 시간이 촉박했다. 돌아가서 오토바이를 반납하고 숙소에 풀어 둔 짐을 챙겨 시간에 맞춰 다음 행선지로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돈을 준다면 도대체 얼마나 줘야 하는 건가?'
'대체 얼마를 줘야 이 놈들 마음에 들어할까?'
'지갑을 보여주면 그걸 다 달라고 할 텐데...'
그렇지만 그에게는 그런 뇌물을 줄 만한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 돈이면 도대체 며칠을 살 수 있는데!'
'내가 한 두 푼 아끼려고 그동안 어떤 개고생을 하고 다녔는데!'
예상했던 대로 무대에 새로 등장한 상대방은 전 파트너보다 더욱 강경했다. 여전히 한글 조항을 눈 앞에 들이 밀고 있었다. 게다가 돈이 없다고 애원하는 그에게 정 그렇다면 오토바이를 압수하겠노라고 선포했다. 그는 절망적이었다.
"쏘리~쏘리. 아이 해브 노 머니!"
이 말 밖에는 더 이상 외칠 게 없었다.
"그럼,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택시를 타고 가서 호텔에 가서 돈을 가져와라! 택시를 불러 주겠다!"
택시마저 경찰과 한 파인 지 싸이카 옆에 물끄러미 대기 중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입에서 아무 말도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경찰이 종이 위에 이렇게 펜으로 썼다.
"You know, I can help you~"
"?"
'이건 뭔 소리야! 그래 봐야 돈 달라는 이야기밖에 더 돼!'
그는 복잡했다.
"아~"
한숨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오토바이도 뺏기고 돈도 날리고 버스표도 날리는가?'
'하루 더? 이곳에서 하루 더 자게 되는 건가?'
'결국 어떻게든 돈을 주지 않으면 이 마수걸이에서 풀려 나긴 불가능한 건가?'
그는 다시 눈을 찡긋 감았다. 그리고 한번 더 외쳤다.
"아임 쏘리! 아이 해브 노 머니!"
"투 어클락 테이크 플라이트 앤드 컴백 홈!"
"룩 앳 디스. 위 해브 노 머니. 쏘~ 쏘리!"
"위아 레이트. 투 어클락. 컴 백 홈!"
"쏘 소리~ 플리스. 위 해브 노 머니!~"
자신의 딱한 처지를 보라는 듯 아들에게도 시선을 흘리며 공중에다 분사했다.
지겨웠을까. 그들이 벼락같이 말했다. 가라고.
"!?"
"오케이! 오케이!"
"땡큐! 땡큐!"
"깜 언, 깜 언! 깜 언, 깜 언~"
그는 아들을 태우고 그 길로 유턴을 했다. 그리고는 달아났다. 뒤도 안 돌아 보고 숨도 안 쉬고 죽도록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