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by 아빠를 여행하다

_ 17.


식당 주인이 숙주와 완두 줄기, 라임이 담긴 야채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굶주린 나머지 야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릇에 담긴 국수를 사정없이 들이키고 있었다. 면발은 굵고 쫄깃쫄깃했다. 닭살도 토실토실한 것이 씹을 때마다 잡아당기는 탱탱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매일 먹고 다니는 쌀 국수인데도 질감과 맛, 부드러움이 집집마다 달랐다.

방비앙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배를 채우고 마을 꼭대기까지 둘러보았지만 그랬다. 때 묻지 않은 성지란 없었다. 그동안 다녀간 한국 단체여행객의 손길(?) 때문이었을까. 거리를 따라 빼곡히 들어선 수많은 마사지 숍과 부풀어진 방 값, 빵 값 이런 것들이 눈에 거슬렸다. 마치 우리나라에 단풍구경 온 듯한 괴리감을 불러일으켰다. 옷깃을 풀어헤치고 느긋이 걸어 다니기에는 오히려 이 나라와도 멀어진 느낌이었다. 젊은 백패커들이 주로 운집한 동네 끄트머리엔 쿠션에 기대 빨대를 꼽아 마시는 주점과 식당들이 늘어서 있었다. 70년대 롹, 레이브, 브릿팝으로 시끌벅적한 펍과 빠들 간판에는 "HAPPY" 또는 "HAPPY TIME"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공공연한 마약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방비엥에 들어오기 전 위왕짠에서 백패커들로 가득한 호스텔에 머물렀으나 호 불호가 갈렸다. 각국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고 어울리기는 좋았으나 현관 입구는 밤만 되면 담배 연기와 맥주 파티로 온통 소란스러웠다.

'젊어선 나도 그랬지'


그는 이렇게 대뇌이다 아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도미토리에는 영영 마르지 않는 쉰 빨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주렁주렁 매달린 미국 여자아이들의 아롱다롱 무지개 팬티를 구경해야만 했다. 빈 침대들은 새벽이나 돼야 제 주인을 맞이했다.

그는 더 이상은 아닌 것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여행길에도 자기 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고독하더라도 홀로 멈춰진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더 이상 아빠는 이제 도미토리에 자신이 없다. 이젠 아닌 듯싶다."

"그래? 난 참 좋은데~"


아이는 이층 침대가 꽤 만족스럽다고 했다. 이런 데만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는 불편해.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이런 곳이 재미가 없어~"


그는 마음속으로 도미토리와 작별을 고했다. 주머니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머물러야 할 경우만 비워두자고 다짐했다.

그들은 방비앙에서 오토바이 대신 자전거를 빌리기로 했다. 곳곳에 널린 동굴들과 물 웅덩이들을 돌아볼 셈이었다. 그러려면 시내에서 개울을 건너야 했다. 보행자들과 흔들흔들 아슬아슬하게 대나무교를 지나 적갈색 대지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방비앙의 울퉁불퉁한 카르스트 산세는 마치 방. 비. 앙.이라고 또박또박 쓰인 것 같았다. 보이는 모양 따라 부르는 듯했다.

블루라군 쪽으로 길을 나섰다. 가다 보니 맞는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한 손으로 나뭇잎을 돌리며 걸어가는 소녀에게 "블루라군!"을 외쳤다. 잘 안다는 듯이 왼쪽 길을 가리켰다. 계속 가다가 이 길이 맞나 싶어 입구에서 소녀 오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는데 왜 못 믿냐는 표정이었다. 오르락내리락 숲길을 지나 나무 표지판 하나가 나왔는데 라군은 라군인데 "블루"라는 표시는 없었다. 동굴 표지판이 함께 붙어 있었다.

주욱 들어가 보니 프랑스 커플이 정자에 걸 터 앉아 있었다. 자기네들도 뭔가 하고 들어와 봤다고 했다. 그들이 찾던 블루라군은 아니었지만 힘들게 온 공로가 있어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들어가 보기로 했다. 동굴로 안내하겠다며 한 처자가 앞장을 섰다. 숲을 헤치고 나오니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떼들이 펼쳐졌다. 전원을 가로질러 산 밑에 도착하니 그 길을 따라 오르면 동굴이 나타난다고 했다.

멀리서 볼 때는 방. 비. 앙.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막상 산에 접어드니 그게 아니었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돌짝 바위들로 인해 발 디딜 곳을 찾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샌들을 신고서는 도저히 오르기 힘든 길이었다. 마치 돌출한 울버린 손가락에 팍팍 찔릴 것 같은 우범지대였다. 바위 사이를 손바닥으로 겨우 집어가며 산 허리에 오르니 조그만 구멍이 나타났다.


"애걔?"

"겨우?"


그 크기에 실망했다. '꽁로만큼 큰 동굴을 생각했었나?' 잠시 착각했었다. 그래도 코끝을 파고드는 풀 냄새와 온몸을 휘감는 축축한 기운만큼은 오감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오기를 참 잘 했다고 흡족해했다.

동굴에서 내려오는 길에 라군이라 표기된 물 웅덩이가 나타났다. 그는 아들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했지만 사춘기의 교향곡이던가. 계속해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왜 인지. 바닷가에서도 그랬듯 그가 먼저 들어가야 일이 풀렸다. 또다시 스스럼없이 물속에 들어가는 동작을 택했다. 그리고 읊조렸다.


'아~, 이제는 아닌데...'


젊어서처럼 물로 사정없이 뛰어들지 못하는 저 자신이 더 어색했다. 아들은 어미 물소를 찾아가는 새끼처럼 뒤쫓아 들어갔다. 그다음부터는 자기 리듬에 맞춰 점진적인 난리 부르스를 치기 시작했다. 그는 예정했던 곳은 아니지만 흥겨운 시간을 보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블루라군은 주욱 뻗어 있는 길을 따라 망설임 없이 계속 가면 쉽게 나오는 그런 길이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이미 꽤 많은 차들과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 벌써부터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환호성이 멀리서부터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여행 오기 전 그곳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물속으로 쉴 새 없이 뛰어드는 풍경이었다. 마치 타잔처럼 나무에 매달린 줄을 타고 물속으로 뛰어드는데 그때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현란한 동작을 선 보일 때마다 주위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그는 그곳에 서 있는 자신을 대입해 보았다. 그때마다 내면에서 공허한 울림이 맴돌았다.


'과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망설임과 초조함이 뒤섞이고 있었다.


'애이~ 그만 해야지~'

'그만해라. 이제 나이가 있지~'


나이가 들수록 가슴은 작아진다고 했던가. 그는 절대로 물에 안 들어간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서지 않으면 아이도 소극적이 되곤 했다. 보고 따라 하는 게 꽤 신경이 쓰였다. 바다에서도 애만 들여보내기로 했었는데 실패했었다. 방금 전 엉터리 라군에서도 마찬가지. 그는 이번 여행에서 또다시 주도적 학습을 복습하는 듯했다. 소심함과 주저함을 벗어던지는 꾸준한 학습을. 혼자라면 절대로 안 하지만 전적으로 애 때문이라고 자위했다. 그러면서도 잃어버린 시절과 혈기에 아직은 살짝 기대고 싶은 마음 역시 붙잡아 보려고 했다.

그는 숨을 빨아 마시며 밧줄을 동여 잡았다. 그리곤 아이에게 잘 보라고 하고 만 천하에 자신을 공개하는 동작을 취했다. 그는 밧줄을 몸에 당겨 물 웅덩이 한가운데로 가지고 나갔다. 그런데 순간 줄을 놓기가 싫었다. 바짝 몸에 당긴 줄은 그와 함께 원래 출발했던 제자리로 돌아왔다. 곧 주위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네를 타고 나섰다가 재주는 안 부리고 그냥 되돌아오는 서커스 동작이었다. 허탕 치고는 이 바닥에서 처음 보는 동작이었다.

그는 또 한 번 달려 나갔다. 하지만 또 똑같이 그냥 들어오고 말았다. 고의적이었지만 막상 웅덩이 가운데서 줄을 놓지 못했다. 이번에도 웃음은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


손에서 밧줄을 놓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낚는 일이요, 명예를 얻는 길이었다. 그는 자신을 풀어줬다. 대신 주위의 웃음소리는 사라졌다. 아들은 아빠를 따라 했다.

청중들은 비키니 차림의 여성 도전자를 더욱 선호했고 틈틈이 줄을 잡고 나서는 나이 든 도전자는 아무래도 찬 밥이었다. 반응하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짜 도전은 따로 있었다. 밧줄이 아니라 다이빙이었다. 동영상에서는 없던 장면이었는데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서 물속으로 곧장 떨어지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임무를 다했다 싶었는데 플랫폼에서 밧줄을 잡고 뛰어드는 것은 몸풀기 수준이었고 본론은 나무에서 뛰어내리기였다. 그게 하이라이트였다. 가만히 올려다보는 것은 내면의 가난함을 증명하는 길이었다. 고민 끝에 그가 한마디 던졌다.


"아빠랑 같이 뛸래?"


자기가 말하고도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미친척하고 뛰자는 말에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안경을 벗어던지고 아빠 손을 잡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가 신병훈련소에서 막타오 훈련할 때만 해도 웃을 수 있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싶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아까와는 전혀 맥락이 달랐다.

그는 나무 위에서 사람들이 쳐다봐 주기를 기다렸다. 누군가 그를 인정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무언가를 열심히 기다리고 있는 아이처럼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는 않았다. '저기 좀 봐 바~ 저기~ 아빠와 어린아이가 글쎄 저걸 한다! 저기 좀 봐~' 이런 함성이 울려 퍼지길 기다렸지만 아랫마을은 매우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더 이상 가만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린 소년들은 몸을 던졌다.

그는 다시 소년이 되었고 그 아이도 어른과 함께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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