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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한 세계와 혼연일체가 된다는 것. 그가 그동안 아이와 하지 못하던 것은 그것이었다. 대단한 모험도 아니고 탁월한 지식 교육도 아니었다. 아이와의 놀이는 양보다 질이라고 배웠다. 이른바 골든 타임 1분. 아이가 아빠보다 먼저 지치면 놀이는 끝. 게다가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면 조금이라도 더 놀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이 기억에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대를 이어 밋밋한 삶을 잇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래도 아이와 노는 것은 그에게 순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지겨운 몸놀림을 심리적으로 딛고 일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순교라는 것이 저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녹아드는 것이기에 보다 고통스럽고 값진 일이라고 여겼다.
그가 유치하다고 등 돌린 세계는 그에게 가장 절실하고도 필수적인 세계 인지도 몰랐다. 우주와 하나 되는 몸놀림이야 말로 미래에 닥칠 돈벌이나 살림살이에 빼앗긴 저 자신의 값어치를 되찾는 순수한 작업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이런저런 삶의 굴곡을 거치면서 마음 한편에 딱딱한 벽이 세워지고 있었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날수록 옴짝달싹 못하는 부자유함이 그의 중심에 못 박히고 있었다.
사고의 틀이 정해지고 패턴으로 고착되면서 몸도 마음도 더 이상 자유롭게 뻗어 가기가 쉽지 않았다. 음악이 흘러도 몸은 흐르지 못하고 가락이 흘러도 마음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실패보다는 성공으로 착오보다는 완성 편에 몸과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러기엔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본능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도 같았다.
그는 한 때 태양이 되고자 했었다. 세상살이에서 성공이란 명제가 그러하듯 그는 그림자 없는 존재이길 꿈꿨다. 행복이라는 인류 공통의 자물쇠를 풀기 위해 그는 인생에 드리운 그림자를 없애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 큰 나무 밑에 거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스스로 태양이길 원했다. 그가 태양의 이름으로 대입시켰던 가지거나 누리는 것들, 돈, 명예, 부동산, 그럴싸한 인맥, 바쁜 일정, 누구나 알만한 평판으로는 자신의 기대치를 온전히 충족시킬 순 없었다. 마음의 지위가 그것과는 다른 값을 병행해서 작동시키고 있었다. 바라고 얻은 것들이 궁핍이나 결핍, 일시적인 두려움을 해소시킬 순 있어도 그가 기대하고 꿈꾸는 희열의 가치는 그보다 늘 위에 있었다. 특히 관계의 저울은 눈금자가 따로 놀았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그랬고 직장 동료와도 그러했으며 가정에서 부모와 아내, 아이들과는 더욱 그랬다. 금전적으로 성공하지 않더라도 또는 명예로서 실패하지 않더라도 관계에서 만족하는 선택을 그의 마음자리는 훨씬 더 원하고 있었다.
저 자신과의 관계는 더욱더 그랬다. 나이를 먹을수록 가슴이 작아지는 것은 저 자신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잃게 되는 것은 진짜 저 자신 본연의 자연스러움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이를 방황하는 자유, 그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이유, 그런 마음자리와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정말로 빼앗긴 것이 무엇이던가!''
'내가 정말로 얻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날 아이가 큰 사람과 무엇을 함께 한 경험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그는 여겼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도 함께 물속에 들어갔다. 한 번도 붙잡고 가지 못한 아버지 손을 붙잡고 그곳에 들어갔다. 그 속은 깊고 고요했고 영롱했으며 꿀처럼 부드럽고 눈처럼 달콤했다. 머리를 추켜올려 강물을 손으로 쓸어내기 전까지 시간은 멈춰 있었다. 신비로웠다. 그는 오랜만에 이겼다고 느꼈다. 스스로도 이겼고 갇혀있던 어린아이와의 게임에서도 이겼음을 확신했다. 아이들이 게임에 종종 빠지는 이유는 그 안에서 영웅이 되고 칭찬받으며 보너스 점수와 같은 보상을 받기 때문인데 그가 그랬다. 탁월한 전능 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날 다시 아이가 되고 성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