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12.
그는 버스 터미널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베트남 사람들의 표정과 신호에 익숙해진다 싶었는데 또 다른 소통체계 앞에 잠시 헷갈리고 있었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간판에 쓰인 글씨는 더 이상 글자가 아니었다. 그나마 알파벳으로 표기된 베트남어 표기는 이제 도롱뇽이 휘젓고 돌아다니는 생물 용어로 막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이전 여행지에서 느꼈던 답답함과 그곳 경찰들과 마주했던 일련의 상처(?)를 씻어 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음식 맛을 보려면 중국으로 사람을 보려면 라오스로 가라는 문구를 얼핏 떠올리며 밝은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다가올 앞 날에 바싹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주민들은 덤덤하게 버스 터미널이 있는 곳을 가리켰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산골 능선은 붉게 물들었고 이젠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날 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을에서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딱히 잘 만한 곳도 없었고 여행자를 위한 식당 또한 없었다. 국경이라는 입지조건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들만이 옹기종기 모여 오손도손 살아가는 그런 마을이었다. 등나무로 지은 특유의 전통가옥에는 개와 닭들이 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고 집 안 밖에는 빨래와 아이들이 듬성듬성 널려 있었다. 그가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할까?"
"그러게~ 어떻게 할까 아빠?"
"우리는 과연~ 오늘 밤~ 어디서 잠을 잘 것인가~ 길에서 잘 것인가~ 절에서 잘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아빠! 길에서 자자! 길에서! 나는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길에서 한번 밤을 새보는 게 꿈이야, 꿈!"
"그래? 그냥 이렇게, 아무 데서나 잘까? 그냥 여기 막 널 부러져서? ㅎㅎㅎ"
춤추듯 흐물거리며 이렇게 말했지만 그는 한시라도 칸막이 있는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었다. 곧장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 있지~ 마분지 좀 구해봐 바"
"마분지?"
"응. 상자 각도 좋고!"
그는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종이박스를 손에 거머쥐었다. 소시 적 배낭 메고 유럽을 돌아다닐 때 히치하이킹을 했던 기억을 더듬어 다시 한번 실력 발휘를 해보려던 참이었다. 허나 그곳이 이 곳이 될 줄은 몰랐다.
종이박스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어내고는 네모 모양으로 돌려서 한 면을 뜯어냈다. 가방에서 제일 굵은 펜을 꺼내 목적지를 찌꺽 찌꺾 적었다.
"SEPON"
현지인들이 그곳에 가면 아침나절에 사반나켓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피켓을 들고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어 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늘 높이 엄지손을 추켜올려도 별 효과는 없었다. 지나가는 차들도 드물었지만 도통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아직은 여유로운 척 그러한 자신들의 모습을 사진도 찍어가며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크게 모션을 취했지만 여전히 보는 척도 안 했다. 승용차 두어 대가 일이십 분 간격으로 지나쳤지만 반응은 없었다.
'글자를 보다 크게 적었어야 했나?'
'아니면 영어로 적어서 알아볼 수가 없는 건가?'
해는 더욱 기울고 오늘 밤 머리를 두고 잘 곳은 미궁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그때 소형 트럭 한 대가 미끄러지듯 그들 앞에 섰다. 부부였다. 운전석 옆에 앉은 아낙네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세폰, 세폰!"
복권에 당첨된 듯 신나게 외쳤지만 그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폰까지 안 가는 듯했다.
"잍츠 오케이~. 잍츠 오케이~"
그는 아무 데라도 좋았다.
"에니 웨월 이즈 오케이"
그곳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손을 머리에 모아 코 자는 표시를 했다. 부부는 서로 몇 마디 주고받더니 대신 다른 곳에 내려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이게 웬 떡인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트럭 뒤로 훌쩍 올라탔다. 하지만 뒷좌석을 개조한 송테우라는 것을 미리 짐작했어야 했다. 예전 태국 북부지역을 다닐 때 곧잘 타던 것이었는데 기분에 들뜬 나머지 영업목적이란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공짜로 얻어 탄 걸로만 생각했다. 게다가 아들에게 뭔가를 하나 보여 준 것 같아 대단히 자랑스러 했다. 들뜬 기분과 뿌듯함이 그의 얼굴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람은 상쾌하고 길도 호젓했다.
그러던 트럭이 멈춰 섰다. 마을 하나를 방금 지나쳤는데 텅 빈 길 가에 차를 세웠다. 언덕 위로 게스트 하우스 하나가 눈에 뜨였다. 여기서 내리라는 듯했다. 사실 그는 좀 더 큰 마을로 가길 바랬다. 그곳에서 잘 만한 곳을 독자적으로 알아보길 기대했다. 하지만 손으로 잠자는 표시를 한 것이 아마도 잘 곳을 찾는 걸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게다가 이미 전화를 걸어두었는지 게스트 하우스 여주인과 딸이 행길로 쩌벅쩌벅 내려오고 있었다.
"반동"
부부가 말했다.
"반동?"
"반동"
그리곤 숙소를 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게스트 하우스?"
"게스트 하우스"
그리고는 돈을 달라고 손을 벌렸다.
"머니?"
"머니"
그는 곧 실망했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네'
그는 인식의 오류를 급히 수정해야 했다.
'공짜가 아니었네~'
차비는 저렴하지도 않았고 게스트하우스도 생각보다 싼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선택은 없어 보였다. 숙소 주인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나이를 분간할 없는 여주인 딸이 옆에서 제법 영어로 시중을 들었다. 하는 수 없이 국경에서 못한 환전을 그들을 통해 하곤 차비를 내줬다.
숙박료는 부른 가격 그대로 다 내기가 왠지 어색했다. 그는 아들에게 다른 가격을 제시해 보라고 했다. 아들은 주인 딸에게 다가가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오만 낍"
그녀는 처음에 터무니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아들의 태도도 단호했다. 무턱대고 단호했다. 결국 자기 엄마에게 물어보고 오겠노라 하고는 떠났다. 결국 팔만에 시작한 호가는 아이들 선에서 육만에 마무리되었다.
그들은 짐을 풀고 늦은 저녁밥을 먹기 위해 마을로 거슬러 올라갔다. 제법 긴 거리였지만 다리 펴고 누울 곳이 있다는 안도감에 천국을 노니는 듯했다. 밥 집 두 곳이 빈 도로를 마주 보며 가녀린 불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그나마 손님들이 들어차 있는 곳에 몸을 맡겼다. 현지 총각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고물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뜨거운 국물에 술 한잔 씩을 곁들이고 있었다. 그는 뭘 시킬지 몰라 손가락으로 같은 것을 달라고 하니 잠시 후 김이 펄펄 나는 국수 두 그릇이 나왔다. 고수와 민트, 야채 더미가 그릇에 푸짐했고 고기도 제법 두툼하게 썰린 것이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마을에 느닷없이 나타난 이방인을 향한 낯선 시선들은 음식 먹는 내내 쏟아졌다. 그럼에도 꽤 대응할만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계산하고 나오는 순간까지 서먹서먹한 현지인들의 눈빛은 이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태어날 때부터 다녔던 길처럼 너무나 익숙했다. 하지만 밤하늘을 가득 매운 밤공기는 그에겐 처음 선사하는 풍미였다. 그냥 산 공기라고 하기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꽃 향기로 뒤범벅이 되어 천지를 뒤덮은 듯한 향취가 그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맛보지 못한 맛을 씹고 있었다.
동네 개들이 그들과 발맞춰 걷고 있었다. 하늘의 별은 선을 미리 그어 놓은 듯 깜빡대고 있었고 카시오페아, 북극성, 그밖에 별자리들도 이름을 비워 둔 채 정답을 맞혀 보라는 듯 선분과 꼭짓점을 밝히고 있었다. 그의 눈이 그것을 쫓다가 멀어버릴 지경이었다.
눈이 멀고 코도 막힌 그가 아들 손을 꼭 쥐고는 낯선 밤길을 노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