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졸사원이다 73] 고인물은 썩는다
"내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 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 자재 복귀한 기술부서에서 전송망 공사 자재 담당을 하게 됐다
오랜 시간 동안의 노력으로 쌓은 역량을 인정받고 야심 차게 회사에서 나름 잘 나가는 부서로 자리를 옮겼던 나는 넉 달간의 암 치료 후 다시 기존의 부서로 돌아왔다. 기존 부서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남짓, 그동안 2개로 나누어져 있던 기술부서는 한 개의 부서로 통합이 되어 있었다. 내가 자리를 옮기기 전에 나와 함께 근무하던 팀장님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서 갔고, 다른 기술부서를 담당하던 팀장님이 통합 부서의 팀장이 되어 있었다.
내가 다시 기술부서로 돌아왔을 때 팀 분위기는 예전과 많이 달랐다. 성격이 소심하고 새로운 일을 만드는 것을 싫어하는 팀장 덕에 '정치적' 성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래도 팀장이 다른 기술부서의 팀장을 하다 하나의 팀으로 통합을 했기 때문에 그 팀에 우리팀이 흡수된 분위기로 주도권 싸움에서 밀린 듯했다.
나는 기존에 근무하던 직무를 다시 담당하지는 못했다. 내가 자리를 옮기기 전 내 업무를 맡겼던 계약직 후배 사원이 정규직 전환을 하면서 내가 진행했던 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직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기술 부서로 복귀했다.
내가 담당한 업무는 전송망 공사용 자재 관리 업무였다. 기존에 담당했던 장비관리 업무와 기본적인 개념은 같았지만 자재의 종류가 달랐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달랐다. 기존 자재 관리 업무를 담당하던 후배 사원은 같은 팀 내 전송망 공사 담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내가 자재 관리 업무를 맡았다.
원래 내가 기술부서로 복귀하면서 기술부서에 빈자리인 전송망 공사 담당을 했어야 하는데 그 직무의 경우 야간에 공사 감독관 업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주간에만 근무하면 되는 파트로 담당 업무를 바꿔 복귀했다.
업무 프로세스와 전산 시스템 활용의 경우 기존에 하던 장비관리 업무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쉽게 업무를 할 수 있었지만 생전 처음 접하는 전송망 자재의 종류와 그 자재의 기능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 부분을 챙기느라 한동안 힘들었다. 특히 같은 자재인데도 전산상에 여러가지 코드명으로 등록된 자재들이 많아 기존에 오랫동안 이 업무를 해온 사람이 아니면 해당 자재가 어떤 코드로 전산에 등록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처음 기술 부서로 복귀하고 두달 동안은 현황 파악과 더불어 이제껏 처리되지 못한 일들에 대해 리스트업을 해나갔다. 그 결과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예전에 내가 담당하던 장비의 경우 장비 개별로 모두 바코드 관리가 되었고 매달 재고조사를 통해 분실된 장비의 경우 협력업체와 책임소재를 따져 손해배상 시키거나 손망실 처리를 꾸준히 해왔다. 하지만 자재 관리의 경우 그런 일을 이전 몇 년간 진행한 적이 없었다.
실질적으로 얼마의 자재가 실제 관리 중인 전산 시스템과 맞지 않는지 파악조차 힘들었다. 기존에 장비를 담당하던 사원의 경우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자재관리를 맡게 되었고 전송망 공사 담당자들이 모두 선배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에 눌려 제대로 된 재고조사 한번 하지 못한 채 전산 조작을 통해 급하게 현장에 있는 재고수량과 맞는 것처럼 '보이도록'만 끼워 맞춰온 것이었다.
더욱 문제는 이런 일들이 내부팀이나 현장에서 직접 공사를 진행하는 협력업체 담당자들에게까지도 '당연한' 방식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왜 내가 기술 부서에 돌아온다고 했을 때 그토록 말이 많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일을 잘 찾아내고 어떻게든 공론화시켜 정상화하는데 능숙하다. 그게 조직을 위하는 일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업무 스타일을 알기에 그렇게 업무를 진행하면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서였던 거다.
팀장님께 보고서로 무언의 압박... 결국 고과 평가로 '복수'
▲ 평가 1년동안 쌓인 문제들을 해결한 결과가 좋지 못한 등급의 고과 평가였다
현황을 정리해 팀장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팀장님은 기존에 자재 관리를 담당하던 친구를 불러 어떻게 된 거냐고 닦달을 했다. 하지만 그 닦달은 시늉일 뿐 실질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전송망 공사 프로세스부터 예전에 팀이 분리되어 있을 때 팀장님과 함께 일하던 팀원들이 만든 프로세스가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인데 그 팀의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일은 공론화 되지 못한 채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으로 남게 됐다. 예전 같았으면 본부장님께라도 말씀을 드려서 조치를 받았겠지만 현재 본부장님은 예전 본부장님과 달리 팀장을 거치지 않고서는 일반 사원들과 말 섞는 것조차 싫어하는 스타일이었기에 평소에 소통을 할 일이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제는 오롯이 내가 떠안게 됐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나씩 정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우선은 협력업체 담당자들과 협의하여 정상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만들기 위해 월간 회의체를 구성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번 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사로 들어오는 것조차도 귀찮아하던 협력업체 담당자들이 시간이 갈수록 회의에 적극적이 되었고 본인들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협력업체 담당자분들과 긴밀한 공조체계를 통해 현장에 실제 재고 파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 현장의 재고를 기준으로 전산 시스템상 허위 재고를 처리하고 모든 현황을 '제로썸'시킨 후 새로 잘 관리해보고자 하는 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에는 한가지 꼭 처리해야할 일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같은 팀내에 있는 공사 담당자들의 정산 프로세스 변경이었다.
공사 담당자들이 협력업체 공사대금을 정산할 때 자재 관련된 현황을 확인하고 자재 담당자의 확인을 받은 서류를 첨부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여러 명의 공사 담당자들이 신입사원이 담당하는 자재 업무에 대해 자기들 편한 방식으로 처리하고는 자재 담당자에게 '알아서 맞추라'는 식으로 계속 업무를 진행해왔다.
그 관행을 깨고 정상적인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했지만 입사 7년 차인 나에게도 그 공사 담당자들은 대부분 나보다 더 고참들이었고 프로세스를 쉽게 바꾸기엔 벅찼다. 예전 같았으면 팀장이나 본부장님의 힘을 빌려 옳은 방식이라면 밀어붙일 수 있었는데 지금 회사는 그런 분위기가 안 됐다. 특히 팀장님이 그들과 '한편'이라 더욱 힘들었다.
공사 담당자들과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동시에 매달 재고조사를 시행해 펑크 난 자재 현황을 거짓 없이 금액으로 환산하여 정식 보고서를 올리기 시작했다. 결재라인은 담당, 팀장, 본부장으로 해당 현황을 공론화시켜달라는 팀장님에 대한 나의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 업무가 지금은 너무 힘들었다. 여러 조직이 통합되면서 '관리의 효율성'을 내세워 조직은 점점 더 수평구조에서 수직구조로 바뀌어 갔고 그로 인해 더욱더 '정치판'이 되어가고 있었기에 정상적인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안 됐다. 그 안에서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업무를 했지만 '바보 같은 놈'이라는 피드백과 함께 '스트레스'가 나에게 돌아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1년을 노력했고 처음보다 훨씬 안정적인 프로세스와 더불어 전산 시스템 역시도 실제 현업과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냈다. 1년이란 시간을 이전까지 쌓아놓은 '문제해결'에만 쏟아부은 것이다. 아직 처리되지 못한 문제가 남긴 했지만 이 부분은 위에서 '의사결정'을 해주어야만 가능한 문제였기에 내가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안 됐다.
나의 이런 업무 진행으로 인해 나와 같은 관리파트에 있는 팀원들은 나의 외로운 싸움을 응원해주기도 했지만 '적당히 살지, 왜 저렇게까지 하나...'라는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직접적으로 업무에 연관성이 높았던 '공사' 파트 담당자들은 나를 엄청 불편해했다. 그리고 들리는 이야기로는 공사파트 회의나 회식을 할 때 팀장님이 참석을 하는데 그 안에서 나의 욕도 많이 했다고 한다.
다시 기술 부서에 돌아오고 전쟁 같은 1년을 보냈다. 1년을 '남이 싸놓은 똥'을 치우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나에게 돌아온 건 안 좋은 고과 평가였다. 평가 면담 시간에 팀장님이 나에게 한 말은 '올해 처음으로 이 업무를 담당해서 그런지 업무 파악하는 데만 시간을 보냈고 특별한 성과는 없는 것 같다'였다. 어이없었다. 하지만 그간 우리 팀의 분위기를 보았을 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