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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투툼 appatutum Mar 23. 2020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들어온 새로운 제안

[청년창업가의 꿈과 현실]새로 직장인이 되어야 하나

우리네 인생에 있어 사람들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 참 슬픈 현실이지만 또 밥 먹고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갔으며, 그 중엔 당시 죽고 못사는 사이였던 사람들도 많다. 사회생활 15년차인데 오죽하랴. 


나는 19살 어린 나이에 고등학교 실습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 때부터 '구미'라는 도시와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그 뒤로 내가 27살이 되던해까지 쭉~ 살아온 도시가 바로 구미다. 내 20대의 7할 가량을 보낸 곳. 나에게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 없는 곳이다. 그 곳에서도 역시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또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가 구미에서 다닌 마지막 회사가 있다. 그 회사도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져서 없는 회사가 되어버렸지만 당시엔 나름 업계에선 잘 나가던 중소기업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강소기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 길지 않은 약 1년 정도를 여기서 참 많은 일을 했다. 당시 나는 품질보증팀의 주임으로 근무를 할 때였다. 우리 회사는 생산 라인을 모두 외주로 돌리고 사내라인은 오로지 '검사'의 기능만 가지고 있는 회사였다. 그렇다보니 생산부서가 아주 규모가 작았다. 주부사원 15명 가량을 운영했으니 말이다. 그런 생산부서였기에 '팀'까지 운영하기는 그렇고 당시 '생산관리팀' 산하에 '제조반'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말이 제조반이지 검사 기능만을 가진 곳이다보니 우리 '품질보증팀'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나의 업무는 수입검사 및 외주업체 관리가 주 업무였다. 우리회사로 납품하는 부품업체 약 200여군데와 임가공 업체 선정 및 품질관리를 했다. 사내 검사라인에서 공정 불량이 많이 발생되면 그 이후의 역할은 또 나의 몫이었다. 그렇다보니 제조반장님과는 각별한 사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제조반장님은 나보다 7살이 많은 형님이었다. 성격도 화통하니 나랑 잘 맞아서 아주 똘똘 뭉쳐 다녔다. 그런 인연이 아직까지도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있으니 우리가 잘 통하긴 한 모양이다.  


당시 업계에서 나는 아주 승진이 빨랐다. 우리부서에 나와 같은 직급 같은 호봉인 사람이 나랑 많게는 10살정도씩 차이가 났으니 엄청난거였다. 어린나이에도 상당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시기와 질투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제조반장님의 나이 따윈 신경쓰지 않고 나의 역량을 특히나 더 높이 사주셨다.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신뢰'하시면서 많은 협조를 해주셨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내가 회사를 그만 두고 김해로 내려오고 나서 처음엔 연락도 잘하고 가끔 구미 놀러가기도 하면서 지냈는데 세월이 가면서 얼굴 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가끔 전화나 안부문자 정도 주고 받는 사이로 전락했다. 그래도 그렇게 8년이라는 시간동안 끊기지 않고 인연이 이어졌다. 당시 같은 회사를 다녔던 사람들 중에 나에겐 남아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2015/03/09 1시간 37분을 달려 구미에 도착했다.] 


최근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는걸 SNS에서 보고는 연락이 부쩍 자주왔다. 안부 묻고 뭐해서 먹고 살거냐고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사업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가 없어지고 반장님은 왜관에서 작은 식육식당을 하고 살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공장을 차려 사장님이 되었다. 북삼에 있는 공업용 장갑공장. 그 공장 차린지 얼마 안되었을 때 내가 공장에도 가보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소식을 잘 모르다가 이번에 물어보니 그 장갑공장은 고객에게 품질불량으로 클레임을 맞고 문을 닫았으며 요즘엔 새로운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인에게 새로운 사업제안을 받았는데 거기가 바로 부산 강서구 녹산공단쪽에 있는거라 근처에 내가 있는게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약간 규모가 있는 자동차 부분회사의 생산라인을 아웃소싱 시키는데 그 중에 라인 1개~3개 정도를 따서 할 기회가 생겼다는 거다. 그런데 구미에 살고 있고 이쪽 현지 사정도 잘 모르고 자주 왔다갔다 할 형편도 안되니 나보고 맡아서 운영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음.. 그런데 난 제조업을 떠나 산지가 너무 오래되었고 특히나 자동차 쪽은 전혀 아는게 없는데.. 


걱정을 하니 언제나처럼 '사람 하는 일은 다 배우면서 하면 된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정도면 충분히 가능 할 것 같다고 말이다. 여전히 나의 예전 역량이 머릿속에 박혀서 나에게 '무한신뢰'를 보여주고 계셨다. 참 고맙고 감동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꿈을 찾기 위해 다니던 대기업을 박차고 나온것이 아닌가. 그런데 다시 이런 제안을 받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단칼에 거절을 하려고 해도 당장 나도 직장다닐때만큼의 수입을 올릴 구멍이 없으니 그것도 그렇고 더 중요한건 그렇게 조그만 회사를 운영하면서 내 사업의 경험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당장 거절을 하지 못했다. 


내가 구미에서 제조 반장님과 같이 일하던 직장에 다니기 이전 직장에 창립멤버로 들어갔었다. 그러다 3개월만에 회사 No2.로 승진을 했었다. 파격인사! 사장님께서 당시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나만한 관리자가 없다고 판단을 하셨나보다. 당시에 나는 사장님의 손발이 되어서 거의 회사의 전반적인 모든걸 운영해야 했다. 내 나이가 25살 밖에 안되었었는데 나보다 나이도 더 많은 부하직원들과 난생 처음해보는 인사, 총무 업무에서부터 회사 운영에 관련된 모든걸 하다보니 당시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내 길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런데 지금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만한 경험은 아주 큰 재산이 되었다. 반장님도 내가 그런 경험이 있는걸 알고 있기에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한거다. 


일단 자세한 조건등을 알아보기 위해 약속을 하고 구미로 갔다. 반장님을 만나서 저녁먹으면서 이야기를 했고 다음날은 반장님이 함께 엮여 있는 사장님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먼저 내려와 있는 다른 사장님과 함께 모여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 마음은 조금씩 멀어지는 걸 느꼈다. 나도 너무 오랜시간동안 제조업을 떠나 살다보니 이제 그 '생산,제조' 일이 하기가 싫어졌다. 수고에 비해 보상이 적다는 계산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의 대부분을 회사에 목매달고 살기 싫어서 뛰쳐나온 내게 다시 8시 출근해서 밤 늦도록 회사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도 모르게 이제 '제조'라는 한정된 우물안에 사는 사람들과의 가치관이나 수준 자체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제조업에 몸담고 있는 분들을 무시하는건 아니다. 나도 오랜시간 제조업을 했었지만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나의 '꿈'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니다. 만약 내가 저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하진 않을 것 같다. 어려운 결정이지만 '거절'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내일쯤 연락해서 정중하게 거절을 해야지. 그래도 초기 자리 잡을 동안 인력이나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도와준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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