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8(D+2)_타이완/핑시선
시작은 엉망이었다. 400일 가까운 여행 준비를 정밀하게 하지 못했음은 '아주 오래된 계획'에서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보통 다음 날 일정은 전날 잠들기 전에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어젯밤 핑시선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간단히 핑시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이 글을 읽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핑시선은 루이펑 역에서 시작해 징통 역까지 운행하는 일종의 관광열차다. 과거에는 광산 열차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기능은 사라지고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 좋은 콘텐츠가 되어 있다. 루이펑 역과 징통 역 사이에는 차례로 허우통, 스펀, 핑시 역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각 정거장마다 매력이 달라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은 핑시선의 일일권을 끊어 오락가락하며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자, 그럼 기본적인 설명은 마쳤으니 풍등 하나를 날리기 위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우선 루이펑 역까지는 타이베이 역에서 지하철 같은 기차를 타고 간다. 여기까지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루이펑 역에서 일일권을 끊기 위한 역무원과의 대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단 핑시선은 너무 많이 유실되어 내년 1월 말까지는 운행을 하지 않는단다. 알아들었으니 대안을 말해달라 까지는 수월했다. 하지만 그는 영어를 못했고 나는 영어를 조금 덜 못하는 대신 중국어를 전혀 못했다. 핑시선 기차 대신 배치된 셔틀과 시내버스로 스펀까지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알아듣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셔틀은 2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시내버스에 내 몸을 의탁하기로 했는데, 기차로 실어 나르던 관광객이 버스에 타려니 그 버스 안이 어떨지 상상이 되는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시간이 되어 나타난 버스가 우리나라로 치면 마을버스 사이즈였다는 점이다. 그래도 우리는 지옥철의 민족 아닌가. 어찌어찌 탑승을 했고 몸을 구겨 넣어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40분을 가면 되니 까짓 거 버텨보자 라는 심산이었는데 버스가 가는 길이 미시령 옛길이다. 결국 스펀에 내렸을 때, 나는 오늘 써야 할 힘의 절반 이상을 소모했다고 느꼈다.
타이베이의 나이아가라 폭포라 불리는(이해할 수 없다. 하긴, 산정호수의 직탕폭포도 대한민국의 나이아가라라 불린다) 스펀 폭포를 지나 스펀역 인근까지 걸었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풍등을 접한다. 아직 대낮인데도 엄청난 인파가 하늘 높이 저마다의 꿈을 날리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의 실수를 한다. "그래도 모름지기 핑시역의 이름을 딴 핑시선인데 스펀 보다야 더 그럴듯하겠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날리는 풍등을 구경만 하고 나의 꿈은 핑시선의 하이라이트, 핑시에서 날리기로 마음먹었다. 풍등은 해가 잘 무렵에 날려야 보기 좋을 듯하여 우선은 시간을 벌기 위해 징통으로 갔다. 그리고 징통에서 깨달았다. 왜 그 많은 사람들이 핑시선 관광의 핵심인 풍등을 스펀에서 날리고 있는지.
징통역은 그야말로 고즈넉했다. 조금 더 거칠게 표현하면 쓸쓸하기까지 했다. 관광지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고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징통부터 핑시 까지는 2km 남짓이라 그냥 걸었다. 핑시는 다를 거라는 확신을 갖고 말이다. 하지만 핑시의 관광객은 징통 보다 서너 명 많은 수준이었다. 풍등 광고판을 들고 골목길에 서 있는 분들과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기차가 들어오지 않으니 굳이 버스를 갈아 타가며 이곳까지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스펀에 가이드를 대동한 단체 관광객들이 많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결국 우리는 두어 시간을 한적한 시골 마을에 묻고 다시 스펀으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풍등 앞에 섰다. 풍등은 사면으로 된 기구 모양인데 4면의 색이 모두 다르면 50 대만 달러를 더 지불해야 한다.(색깔 별로 빌 수 있는 소원의 카테고리가 다르다니 기가 막힌 마케팅이다.) 아들과 나는 각각 2면씩 정성스레 채워 넣었다. 세계일주의 무탈한 완성, 가족들의 건강, 우리 색시가 홀로 운영하고 있는 안경점의 번창까지. 우리의 꿈을 가득 담은 풍등은 하루의 고생이 모두 씻겨 사라질 정도로 잘 날아올랐다. 하늘 높이 날아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지만 내 마음의 풍등은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으리라. 여행 극초반의 미션을 잘 수행했다. 일종의 발대식이었는데 둥실둥실 떠나간 풍등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