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9(D+3)_타이완/자이
고심 끝에 아리산 일출은 포기했다. 대만 여행을 계획하면서 타이베이와 가오슝 사이 중 한 곳을 들러야 한다면 아리산이라 생각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약 두 달 후에 있을 ABC 트래킹을 위해 감을 잃지 않아야 했고(한국에 있을 때부터 해온 산행 연습이다.) 또 하나는 대만의 명산이라 하니 여간한 도시 하나를 더 들르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이왕 들를 거면 일출을 보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리산 근처에 숙소가 많지 않음이 문제였다. 아리산 일출 열차는 계절별로 차이가 있지만 보통 5시 전후로 출발하는 듯한데 그 시간에 맞추려면 아리산 근방에서 투숙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아리산행 버스가 출발하는 자이부터 아리산 까지는 편도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어제까지 각방으로 알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대만 입국 이래 연일 흐린 날씨로 일출 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 최면도 한 몫했다. 우선 아리산행 버스를 탈 수 있는 자이로 이동 후 하루를 묵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아리산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와서 가오슝 행 기차를 타는 것이 정리된 최종 계획이었다. 일출 보기야 어렵겠지만 아리산을 즐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이에서 묵는 하루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고 여행 시작 나흘 만에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내게 된 것이다. 대만의 우수한 고속철은 더 많은 여유를 즐기라는 듯 1시간 반 만에 우리를 자이에 옮겨 놓았고 도착한 시각은 12시도 채 되지 않았다.
우연찮게 생긴 여유 시간을 아들의 머리 하는 데 쓰기로 했다. 여행 떠나면 머리 자르기 어려우니 한국에서 짧게 처리하고 나가라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그는 각종 핑계를 대며 장발을 고수했다. 졸업식에 사진이 잘 나와야 한다는 둥, 친구들이 놀린다는 둥, 어쨌든 한국에 있을 때까지는 그도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 입장을 존중해 주려 애썼다. 하지만 1년여의 여행 기간 동안은 철저히 실리적이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머리가 길면 그만큼 정리하기도 힘들고 자주 잘라야 한다. 시간이며 돈이며 여유 있게 다니는 여행도 아닌데 머리까지 신경 쓰고 다니기에는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단발령을 내렸다.
총 세 번의 두드림 끝에 겨우 머리를 잘라주겠다는 미용실을 찾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짧게, 그는 조금이라도 길게 자르겠다는 기싸움이 벌어졌고 디자이너 선생님은 난처한 웃음만 흘렸다. 하지만 난 타협할 생각이 없었고 디자이너 선생님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 가진 자가 더 강한 힘을 지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머리를 짧게 친 아들은 옛날 말로 신수가 훤했다. 나는 아무리 봐도 짧은 머리가 낫다.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 문제는 그의 친구들인데, 머리가 짧으면 이상하다 하는 친구들과 놀지 말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용실 문 밖을 나오자마자 아들은 폭발했다.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의병의 기세가 이와 같았을까.
여행 시작 후 나흘 동안 투덜대지 않고 잘 따라와 기특했건만 이런 일로 부딪히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침묵의 시간을 보내다 저녁 시간을 맞았다. 긴 여행에 끼니는 챙겨야겠기에 야시장이나 둘러보러 나가자고 손을 내밀었다. 두어 시간 정도를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어떤 이야기는 수긍하는 것 같았고, 또 어떤 이야기는 수긍하는 척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를 완전히 풀어준 건 달콤한 파르페였다. 며칠 후에 돌아갈 수 있는 여행이 아니다. 앞으로도 다툴 일이 부지기수겠지만 빨리 풀고 다시 호흡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최고 수훈은 생크림에 딸기를 얹고 그 위에 초콜릿 과자 두 개를 꽂아 넣은 파르페다. 속이 비어 있어 안타까웠지만 괜찮다. 속이 빈 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의 기분이 풀려있었으니까. 파르페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