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6(D+20)_캄보디아/프놈펜
대학시절 홀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당시 인디아나존스에 심취해 있던 나는 역사 속의 불가사의를 찾아다니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고민 끝에 내린 최종 여행지는 항상 그런 류의 장소들이었다. 지금도 최고로 꼽는 여행지 중 하나인 이스터 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공항에서 짐을 부치기 위해 기다리는데 원주민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셨다. 대화가 자연스럽지는 않았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눈치가 놀라울 정도로 예민해진다. 나에게 작은 보따리를 하나 내미시면서 내 짐에 함께 넣어줄 수 없겠냐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공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절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이 짐이 섬에 반입되면 안 되는 것들(예를 들면 마약 같은 것을 상상했었다.)이면 어쩌지'라는 의심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냥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이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섬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터 섬은 아주 작은 섬이고 사람이 사는 마을도 하나밖에 없어 이리저리 돌다 보면 만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녀는 가족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나에게 부탁했던 짐을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했거나 혹은 비용을 더 지불했겠지만 문제는 없었던 것 같았다. 괜히 미안해졌다. 결과론이지만 내가 그녀의 짐을 들고 들어왔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고 낯 선 섬에 좋은 친구가 하나 생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곳이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최근에 다른 이유로 유명해졌다. 악질의 범죄 집단이 발각되면서 우리 국민 중 많은 피해자가 드러났고 대중의 우려를 자아냈다. 그런 캄보디아를 지나가겠다 하니 그 결정은 지인들의 걱정을 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나는 일반적인 공항 입국이 아니라 페리를 타고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 강변에서 입국 수속을 밟는 일정이었다. 아마도 이 생소한 과정에 그들은 더 불안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페리 입국은 만만치 않았다.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이미 두어 달 전에 예약한 페리 티켓이 예약이 안되어 있다는 바람에 와이파이도 안 되는 지역에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타긴 탔지만 강으로 넘는 국경의 출입국 수속이 어찌 진행되는지 모르니 계속 긴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제는 입국 수속 시에 벌어졌다. 비자 수수료가 필요한데 현금만 가능하단다. 명백히 내 실수지만 나는 미국 달러를 수하물 속에 모두 넣어뒀었고 이미 그 짐은 배 밑 어두운 곳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달러를 꺼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짐을 들어 올리고 내 가방을 꺼내야 하지만 그걸 요구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다시 한번 발을 동동 구르는데 비자 발급을 도와주시는 페리 승무원이 ATM이 있으니 걱정 말라며 안심을 시켰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캄보디아 입국 신고소에 내렸다. 좀 전에 나에게 ATM을 말씀하신 분이 오토바이 하나를 세우면서 돈 뽑으러 가자고 뒤에 타란다. 여기서부터 또 그놈의 의심병이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어제 쩌우독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와 함께 셋이 탈 생각이었지만 한 명만 타란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은 입국 신고서에 두고 나 혼자 오토바이 뒤에 올라탔다. 미국 달러를 뽑아서 돌아오는 그 간단한 작업이 진행된 시간은 15분이 못 되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또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양반이 나를 끌고 어디론가 가서 범죄 집단에 넘기면 어쩌나'
'이상한 곳으로 간다고 생각되면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려야 하나'
'혼자 남은 아들은 괜찮을까'
'문제가 생기면 대사관으로 달려가라 했는데 여기는 강 한가운데니 그 마저도 안 될 텐데'
오만 생각을 했지만 100달러를 인출하는 과정은 쉽게 끝났다. 승무원 아저씨는 나에게 캄보디아는 처음이냐, 앙코르와트는 꼭 가봐라 등의 여행객에게 할 수 있는 너무도 당연한 대화를 시도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이 ATM을 찾아주지 않았다면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더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아들의 친구들이 캄보디아에 들어가면 항상 조심하라고 했단다. 장기가 적출될 수 있다며. 예전에 내가 남미에 가겠다고 했을 때 초등학생들이 아닌, 다 큰 어른들은 조금 더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비슷한 걱정을 했었다. 마약 집단이 많아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하라고. 항상 조심하라는 말은 늘 잘 따랐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걱정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늘 결과론일 뿐이니 말이다.
캄보디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밝았다. 베트남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물가가 비싸 나를 섭섭하게 했지만 그뿐이었다. 해가 진 뒤도 마찬가지였다. 조깅하는 사람들, 공원에서 속삭이는 사람들, 노천 식당에서 한 잔 하는 사람들, 모두 내가 한국에서 봤던 사람들과 똑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 또 의심하는 상황이 올지 모르겠다. 모든 사안이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의심부터 하게 된다. 여행자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더 편해지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안 될 것 같다. 특히 아이와 함께라면 아마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할 것 같다. 그게 나를 피곤하게 하고 상대를 언짢게 해도 어쩔 수 없다. 아들과 단 둘이 타지에 떨어진 나를 이해해 주길 바라며 나는 또 누군가를 의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