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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ge May 14. 2020

나의 국민학교 시절

[사진 : 박수근, 나목 전시회, ‘창신동’]

기억 속의 창신동 산꼭대기는 허름한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있던 동네였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인 1965년에  당시 신아일보 기자 형님과 동네 고등학생 형과 함께 유학하던 곳이다. 유학이라지만 실은 자취생활이었다. 그래도 당시는 시골에서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가는 신나는 일이었다. 나보다 한 학기 먼저 서울로 이사 간 여학생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창신동 허름한 집에 들어와 첫날 저녁에 한 일이 부모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부모님께 잘 도착했다는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형들이 시킨 첫 번째 일이었다. 창신국민학교를 다녔지만 국민학교 다닌 기억보다는 형들이 시키는 일, 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아 최희준의 인생은 나그넷길 같은 노래를 부르고, 화투로 할 수 있는 게임을 거의 모두 배운 일, 고등학생 형 친구인 여학생 누나와 놀았던 일 등이 더 생각난다.


낯선 서울에 와서 사는 것이 불편하고 어려웠지만 당시 나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이 하나 있었다. 산 꼭대기 판잣집에서 동대문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저녁부터 켜지는 동대문 근처의 온갖 색색의 네온사인이 현란하게 번쩍였다. 이 신기한 광경을 매일 넋을 놓고 내려다보곤 했다. 한쪽에서부터 불이 차례로 켜지면서 이내 환하게 되었다가 갑자기 꺼지고, 색색깔의 글자가 새겨지면서 번쩍거리는 광경이 계속 반복되는데, 아무리 보고 보아도 지루하질 않았다. 어떤 때는 저녁부터 밤늦게 잠자기 전까지도 그 장관을 계속 내려다보곤 했다.

국민학교가 만 명이 넘어 오전반 오후반도 부족해 3부 제로 운영되기까지 했다. 그때 어떤 신문에서 창신국민학교가 동양 최대의 국민학교라고 했다. 그때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대단한 학교에 다닌다는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동양 최대 콩나물시루 학교를 다니면서 좋아했던 것이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맹위를 떨친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많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고생한 것도 그리운 것도 몇 가지는 조각조각 기억에 남는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은 생활과 관련된 것이다. 산꼭대기 집이라 수도가 없어 물을 밑에서 길어와야 했다. 형들은 산 중턱에 있는 공동 수도가에 나를 데려가서는 줄을  서있으라고 했다. 양손에 물 받을 통을 들고 수돗물을 받기 위한 줄을 서있어야 했다. 줄이 줄어 수돗가에 다다르면 형들이 오고 함께 물을 받아 산 꼭대기 집에까지 길어가곤 했었다. 물동이를 들고 올라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공동 수돗가에 길게 서있는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매우 싫었다. 비록 시골이었지만 집에서는 이런 일을 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숙제하다 부모님 몰래 집을 빠져나가 아이들과 놀다가 혼이 난적이 있어도 집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먹는 것과 관련된 기억이다. 시골에서는 먹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침에 뜨거운 밥에 날계란을 올려 간장과 참기름에 비벼주면 먹고 학교에 갔고, 도시락에는 계란 프라이가 밥 위에 놓여 있었고 반찬도 장조림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달랐다. 우선 평소 밥 먹는 반찬이 김치와 김 그리고 간장밖에 없었다. 이나마도 생활비가 떨어져 가는 월말이 되면 김은 사라지고 김치와 간장을 찬으로 해서 밥을 먹었다. 점심 도시락은 골목 앞 가게에서 비닐봉지에 담겨있는 김치를 오래된 맥심 커피 병에 넣어 가져 가 찬으로 먹었다. 친구들 도시락에는 밥 위에 있는 계란 프라이가 매우 부러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친구들 어묵볶음이나 멸치볶음 반찬을 한 번씩 얻어먹곤 했다. 생활비를 충분히 보내주었는대도 이렇게 먹고사는 것을 나중에 알아챈 엄마가 밑반찬을 많이 보내 반찬은 어느정도 해결되기도 했다. 엄마는 두고두고 이때 일에 대해 기자형 없는데서 불평하였었다.

가끔은 기자 형님이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사주기도 했다. 고등학생 형은 검은색으로 물들인 군복 윗도리를 입고 있었는데, 주머니에다가 음식점 식탁 위에 있는 고춧가루, 단무지 같은 것을 담아 넣기도 했다. 그때는 재미있어 깔깔대고 웃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마저도 필요했던 것이었다.

즐겁고 그리운 기억도 있다. 신아일보 기자였던 형님은 나 같은 국민학교 학생의 눈에는 매우 멋있는 롤모델이었다.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신아일보가 있는 광화문까지 가는데, 몇 번 함께 타보기도 했다. 형님은 항상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문고판 책을 들고 읽었다.  그 멋진 모습은 기자 이상의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을 보여주는 듯했다.

기자 형님은 펜으로 잉크를 찍어 원고지에 글을 썼다. 기자이지만 무슨 소설을 쓴다고 하면서 집에 있을 때는 항상 글을 썼다. 파란 잉크가 4홉들이 큰 소주병에 담겨 있었고 이를 작은 잉크통에 부어 쓰곤 했다. 당시 벽에 쌓여 있던 그 원고지가 내 키만 큼 됐다. 원고지를 찢어가듯 글자를 써 내려가는 소리가 날카로우면서도 상쾌하게 들렸다. 그 이후 원고지를 보면 그 소리가 들리곤 했다. 아마도 평생 글을 쓰게 된 내가 당시 글을 쓴다는 것에 흥미를 느낀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고등학생이었던 형도 나와 함께 기자형에게 의탁된 학생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직접적인 생활 간섭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은 나와 동갑인 그 형 동생이 서울에 놀러 왔는데 어찌하다가 나하고 크게 싸웠다. 그때 이형이 자기 동생과 나를 벌세우고 막 때리며 혼을 냈는데, 나보다도 그 녀석이 더 터지는 것을 보고 형에 대한 신뢰감이 생기기도 했다.

창신동에서 1년 정도 살다가 아현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짐 보자기를 싸서 등에 메고 동대문에서 마포를 가는 전차를 여러 번 왕복하며 짐을 옮겼다. 그래도 그때 이사는 힘들다기보다는 즐거웠고 신나는 경험이었다.


아현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학교 운동장 구석에 큰 풀장까지 설치되어 있는 학교였다. 아현국민학교와 이웃하고 있는 경서중학교가 있었다. 언젠가는 동네에 큰일이 일어나 형들과 함께 경서중학교 정문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간 적이 있었다. 경서중학교 학생들이 탄 버스가 현충사 수학여행 갔다 오던 중에 충남 모산역에서 기차와 충돌로 수십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형들이 책을 산다고 광화문에 있는 서점 숭문사까지 걸어서 다녀온 적도 있다. 이 책방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멀리 걸어갔던 곳이었을 것이다. 이 책방에서 잃어버린 교과서를 샀던 기억이 난다. 이 서점에서만 판다고 했다. 기자형도 책 몇 권을 샀는데 손에 들어오는 작은 문고판 책들이었다.


숭문사까지 간 것은 몇 번 되지 않았지만, 서대문 사거리까지는 자주 갔다. 일요일이 되면 기자형이 영화 초대권으로 자주 서대문 사거리 근처의 영화관을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돌아오는 길에 중국집에 들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사주기도 했다. 기자형이 집에서 보내준 생활비를 받아 다 쓰고는 공짜로 받은 영화초대권으로 달래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부모님께서 계속 형들과 자취하게 할 수가 없었는지 형들과의 자취생활을 끝내게 하고 아현동 근처에 집을 얻어 외할머니가 오셔서 나와 함께 있도록 했다. 특히 이사 간 곳이 산 위가 아니라 평지에 있는 한옥집이었기 때문에 더욱 좋았다.


집 골목 앞에는 조그만 연탄공장이 있었다. 동그란 통에 기다란 여러 개의 쇠막대기가 들어가며 찍어내면 연탄이 나오는데 이것이 신기해서 학교를 오가는 길에 오랫동안 들여다보곤 했다. 아현국민학교는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있지만 살던 집과 그 동네가 다 없어져 재개발 아파트 단지로 변했고 어디가 연탄공장인지 알 길이 없다.


당시에는 중학교를 잘 들어가면 바로 명문 고등학교, 그리고 명문대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좋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국민학교 때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나도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과외공부를 했다. 당시 선린고등학교 학생을 입주과외 선생님으로 모셔서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서울에 유학 보낸 부모님으로서는 큰 투자를 한 것이다.


고등학생 과외선생은 각진 얼굴에 눈매가 매섭고 말수가 적었다. 여름 방학 때 과외선생 집인 충청도 웅천에 함께 간 적이 있는데 집안이 쇠락한 듯 집은 작고 허름했지만 그때까지 머슴 할아범을 두고 살고 있었다. 과외선생은 입주과외의 효과를 내고 싶었는지 지독하게 가르쳤다. 추운 겨울날 새벽 과외를 한다고 잠 깨라고 집 밖 세워두기도 했다. 좁고 깜깜한 기다란 골목 끝에 있던 집 대문 앞에서 벌벌 떨며 서있어야 했다.


아현동에 할머니와 함께 있었을 때 부모님 모르게 한 손님이 자주 오셨었다. 외할머니 남동생인 할아버지였다. 당시 흰색 양복에 백구두까지 차려입은 훤칠하고 잘 생긴 분이셨다. 이 할아버지가 오시면 보통 2주 정도 계시다가 가셨는데, 본 부인 외에 두 분의 부인이 더 계셔서 그분 중에 한 분한테로 가셨다고 했다. 우리 집에 계시는 동안에는 주로 책을 많이 읽으셨다. 어떤 때는 비음으로 울리는 목소리로 삼국지를 아주 재미있게 읽어주셨다. 그리고 당인리 근처의 한강도 몇 번 구경시켜 주셨다. 함께 한강까지 걸어가면서 길 근처에 있는 건물들을 설명해주셨는데, 가는 길에 마포경찰서, 그리고 건너편에 마포형무소를 지날 때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걸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아현동에서 살았는데 중학교가 남산 위에 있어 학교에 가기 위해 전차를 타야 했다. 아현동에서 남대문 시경 앞까지 전차를 타고 간 후 거기에서 남산도서관까지 올라가서 그곳에서 계단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당시 전차 차비가 편도 2원 50 전이어서 왕복 차비가 5원이었다. 그래도 학교 다니는 가장 큰 기쁨은 하굣길에 남대문 시장에서 퉁퉁한 아주머니가 가오리 벗기는 신기한 손놀림을 마냥 바라보는 것과 순대와 멍게 사 먹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순대와 멍게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고등학교 1차를 떨어져 재수를 하게 되었고 이때 아버지는 쌍문동에 있는 친구분 집에 하숙시키기로 결정하면서 나는 소년기 5년을 살았던 아현동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도 동대문 근처를 지나면서 창신동 산 위를 바라보거나, 아직 그 자리에 있는 아현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다 보면 국민학교 때 생각이 떠오른다. 그때 네온사인, 형들, 연탄공장, 전차, 만두 팔던 중국집, 백구두 할아버지 모두 추억 속에서는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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