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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ge Jan 15. 2022

노트와 분필

일본의 전통 사수

노트와 분필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를 회상한다는 것은 이미 50년이 훌쩍 넘은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이들이 대부분 운동장으로 나가 뛰어놀 때 두어 녀석들이 다시 반으로 들어가 애들 책상 위에 올라 질겅질겅 밟고 다니던 짓궂은 일을 했던 것도 생각이 난다.


물론 운동장에 나가서는 2인 일조로 여자 애들이 하고 있는 고무줄놀이에 다가가서 고무줄을 끊고 다니기도 했다. 고무줄이 주먹에 하나 가득될 때까지 그 짓을 하곤 했다.


뭐니뭐니해도 당시를 회상하게 하는 것은 노트, 연필, 칠판 같은 문방구류일 것이다. 최근 인터넷 쇼핑을 하다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문방구 용품을 발견하고 두어 가지를 샀다. 하나는 일본 제품으로 노트였고,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분필이었다.


왼쪽 모서리를 검은색으로 책장을 하고, 앞면에 영어로 NOTE BOOK이라고 두꺼운 고딕체로 쓰여있고 중간에는 제목과 이름을 쓸 수 있도록 줄이 길게 쳐져있는 노트다.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많이 사서 썼던 노트 디자인 그대로였다.


비록 일본 제품이지만 어째서 50년 전에 사용하던 노트가 디자인 그대로 지금도 만들어 팔고 있는지, 그리고 이 노트가 요즘 아이들에게 팔리기나 할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속지를 만져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렸을 때 기억은 종이질이 거칠었고 연필로 글을 쓰면 종이가 찢어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약했는데, 이 노트는 반질반질한 느낌이

나는 아트지 같은 종이였다. 옛날 종이보다 더 얇고 더 고급 종이였다.


우리 서점에서 요즘 팔리는 패션 노트들의 종이 지질도 이와 같이 글을 쓰기 아까울 정도의 고급스럽게 만들고 있다. 패션 노트가 아닌대도 고색창연한 그 디자인 그대로의 노트에 종이질은 최근의 품질 종이로 만든 것이라 좀 신기했다.


또 하나는 선생님들이 강의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분필이었다. 고등학교 때 어떤 선생님은 대단한 기술을 가지고 계셨다. 칠판에 수학을 풀다가 졸거나 딴짓하는 애한테 분필 쥔 한 손으로 분필 끝을 똑 잘라서 정확히 그 아이 머리에 던져 맞추는 기술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수업이 끝나면 남은 분필을 가지고 한 손으로 분필을 부러트려 던져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었지만 분필 상표 이름은 일본 이름이다. 요즘은 가루가 날리는 분필로 청 칠판에 판서하기보다는 화이트보드 칠판에 보드 마카펜으로 판서하는 것이 대세가 되면서 분필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한 분필 만드는 회사도 이런 이유로 공장 문을 닫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 분필을 사용하고 있는 미국 등 여러 외국 유명대학에서 그 분필 생산을 계속해주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이를 지켜보던 우리나라의 한 회사가 일본 분필 공장을 기술자까지 인수하여 우리나라에서 계속 생산하게 된 것이란다.


오래전에 쓰던 노트와 가루가 많이 날리지 않는 분필을 만지작 거리면서 생각했다. 왜 여러 경제학자들이 10-20년 후에는 우리가 일본을 제치고 G7 국가가 될 것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은 아직도 공업규격이 통일되지 않은 대표적인 나라이다. 공업규격이 규격화되지 않으면 물류, 유통에서 많은 비 효율이 발생하여 경쟁력이 떨어지는 요인이 된다. 공업화가 비교적 일찍 이루어진 탓도 있지만 제품 규격, 포장, 다자인을 바꾸지 않는 것이 그 제품의 전통을 유지하는 일이라는 대를 걸친 전통 유지의 DNA가 규격 표준화를 가로막는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훌륭한 지질의 종이로 만든 노트를 50년 전 디자인 그대로 만들어 파는 고집스러운 전통 유지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2022년 지금 이 노트를 쳐다보니 전통을 고집스럽게 쥐고 있는 바람에 파괴에 의한 창조를 아예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 일본이 산업화 성공 국가로 성장할 때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던 많은 제품들 대부분이 미국이 보유한 원천기술을 응용해서 만든 것이었다. 이제 일본이 보유하던 기술의 대부분은 우리나라로 이전되어 오고 있다. 분필까지도.


일본 제품명을 그대로 마케팅에 이용하는 유리나라의 분필 업체는 일본에서 졸한 공장을 한국에 가져와 세계적인 분필 업체로 재 탄생시킨 것이다. 일본이 전통을 이어간다지만 실은 일본인보다 그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인 것이다.


아무리 과거로부터 이어오는 전통을 사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도 혁신으로 이어지는 것을 가로막는 고집이 되어서는 그 의미가 퇴색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창조와 혁신은 전통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전통을 고집으로 지키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전통을 기반으로 한 혁신이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클래식 음악, 대중음악, 영화와 드라마까지 세계인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그만큼 우리 몸에 녹아 있는 전통이 고급 지기 때문에 세계인에게도 보편적일 수 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혁신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우리의 아이덴티티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낡은 디자인 노트 한 권을 보며 우리의 희망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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