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아온 긴 연휴를 맞아, 그동안 소원했던 지인들과 부부동반 여행을 떠났다. 우리 세 부부는 동해안의 고요한 펜션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모처럼 웃음이 가득한 시간을 보냈다. 일상의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 속에서 나누는 대화와 식사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다. 여행을 마친 뒤, 우리는 집 근처에서 저녁 식사로 뒤풀이를 이어갔다.
누군가 저녁 후에 커피 한 잔 하자는 제안을 했다. 어느 곳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집사람이 가까운 곳을 두고 더 먼 카페를 추천했다. 나는 “왜 가까운 곳을 놓아두고 왜 더 먼 곳을 가려하느냐? “며, 그 이유를 묻자 집사람이 자신은 가까운 곳을 알지 못한다 하고, 나는 재차 아니 왜 그곳을 모르느냐 하다가 부지불식간에 우리 둘은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 장어를 맛있게 먹던 두 부부는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난처한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 상투적인 말들로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다. 나는 그제야 아차 싶어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말없이 앉아 있어야 했다.
그 후, 그들은 우리 부부를 위로한답시고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남녀끼리 나누어 앉았다. 남자들끼리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두 분이 이런 말을 꺼냈다. “실은 나도 똑같은 심정이야. 자잘한 걸로 이건 해라, 저건 하지 마라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한 달간 말을 안 하고 지낸 적도 있다.” 또 다른 분은 “얼마 전에도 사소한 걸로 말다툼을 해서 겨우 여행 가기 직전에 풀었다”라고 덧붙였다. 그들의 말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내 감정에 공감하며 동조하는 듯했다.
나는 여행 막바지에 분위기를 망쳐 미안하다며 머리가 땅에 닿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두 부부를 보낸 후, 우리 부부는 말없이 서먹서먹한 기운을 안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평소 존경하던 재계 30위권의 한 회장님과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이 일을 털어놓았다. “저도 그렇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나이가 들면서 부인과의 관계에서 꼼짝 못 하고 산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회장님은 어떠셨나요?” 나의 다소 경솔한 질문에 회장님은 뜻밖의 대답을 주셨다.
“나도 한때는 부인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며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 말이 다 맞다고 해줍니다. 설사 틀린 말이어도 맞다고 하고 부인 편을 들어줍니다. 지금까지 애 낳아주고 밥 해준 사람인데, 여러 사람에게 하는 일도 아니고 부인 한 사람에게 하는 일이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부인이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하지 않는 한, 어떤 말이든 동조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부인들이 나이가 들면서 가장 큰 무기인 매력이 사라지고 불안감을 느끼기에 남편에게 강하게 자기주장을 어필하려는 것일지 모릅니다. 남편이 ‘매력 있다’, ‘예쁘다’, ‘잘했다’, ‘고맙다’고 말해주고 쟁점에서도 부인 편을 들어주면 부인이 굳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지 않을 겁니다.”
회장님의 말씀은 수년간의 내 행동과 말을 돌아보게 하는 현자의 충고였다. 나는 그동안 아내의 잔소리와 사소한 간섭에 불평만 했을 뿐, 한 사람의 여자로서 매력이 사라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는 평생의 반려자를 안쓰럽게 감싸안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다짐한다. 아내가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하지 않는 한, 어떤 말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되어주리라. 그것이야말로 함께 늙어가는 부부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