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지각 한 날이, 정시에 등교한 날보다 많았다.
학교 수업의 첫 시간은 주로 독일어였다.
독일어 선생님은 어제 먹은 술이 아직 깨지 않은 날이 많은 대쪽 같은 분이었다.
지각이 잦아 수업을 반도 못 듣는 날이 많았다.
결국 졸업할 때까지 독일어 문법은 이해가 안 됐다.
지각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 손꼽는 이유 하나는 물리적 거리였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를 갈아타야만 갈 수 있었다.
등교 시간은 1시간 30분이 넘었다.
집에서 타는 첫 버스에는 교복을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지만, 버스를 갈아타고 학교로 가는 두 번째 버스에는 중고등학생은 찾아볼 수 없이 초등학생들만 옹기종기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홀로 교복을 입고 버스의자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며 학교로 향했다.
담임 선생님은 심한 결벽증이 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지각한 나를 벌하기 위해 체벌할 때만큼은 결벽증을 잊으시고 막대기를 휘두르셨다.
지각은 했지만, 당연히 매 맞기는 싫었던 나는 매일 작전을 짰다.
먼저 등교한 친구에게 연락하면서 교실 상황을 파악하고 각종 루트로 조용히 잠입을 시도했다.
잠입 작전 성공률은 50퍼센트 정도였으니, 지각 생활이 적성에 맞지는 않았나 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알 수 없는 삶의 궤적에 따라 절대로 지각을 해서는 안 되는 학교로 진학했다.
내가 얼마나 버티다가 엄격한 학교에서 잘릴지 내기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학교생활에 적응을 마친 나중이었다.
친구들의 애정이(?) 듬뿍 담긴 걱정과는 달리 나는 지각 생활을 청산하고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요즘도 저명한 지각쟁이가 개과천선한 사건은 친구들과의 단골 잡담 소재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격언과 인간은 사회적이며 장소와 상황에 적응이 가능한 존재라는 분석 사이의 딜레마에 내 경험은 딱히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몇 가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다른 기억들은 바랬지만, 내가 지각하며 탔던 한산한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들.
친구들과 연락하며 작전을 짜고 학교 잠입하고 때로는 실패해 벌 받는 시간들.
정해진 틀에서 한 발자국 밖으로 내딛었던 경험이 아직 선명하다는 것.
그리고 그 기억들이 여전히 현재의 내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내게 사랑의 매를 세차게 휘두르던 담임 선생님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역시 선천적 지각꾼이 맞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