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을 만났다.

by 김대호

앤을 만났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십 년 만에 넷플릭스에서 빨강머리 앤을 다시 만났다.


옛날 TV 어린이 만화 속 앤은

가끔 문제를 일으키긴 하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삶을 살아내는 말괄량이 소녀였다.

꽤 긴 시간이 지나

지금 만나고 있는 넷플릭스의 앤은

인간이 극단적으로 결핍하면 어떻게 변하고,

결핍에서 해방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차근차근 보여준다.


만화에서는 다루기 힘들었을 앤의 과거에는

원하는 것이 모두 결핍한 처절함 그 자체다.

그렇기에 앤은 병적인 상상력을 통해 원하는 것들을 채우고

실체 없는 자유를 잠시나마 찾는다.


여러 사건 후에 앤은 절제된 따듯함을 지닌

마릴라와 매슈의 녹색지붕 집에 오게 되면서

가족과 사랑, 놀이와 친구, 공부와 독서, 소매 장식이 달린 옷 같이

평범한 것들에 대한 결핍을 하나씩 채워나간다.


이미 충분히 지닌 사람들이 보기엔 어리둥절할 정도로

하나씩 삶의 부족함이 채워질 때마다

앤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문학적 찬사와 함께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한다.


그러한 장면들을 목격하고

공감하며 흐뭇하게 웃는 것이

가끔은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이

앤의 이야기가 선사하는 의미일 것이다.


동시에 결핍이 없는 것이 유일한 결핍인

이 시대와 나이 든 나에게

앤은 동그란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음을 던진다.


한이 없는 물질적인 풍요로의 달음박질과

정신적인 고갈에도 목말라하지 않는 삶이

정말, 정말로 괜찮단 말인가요?


앤을 만났다.

동시에 많이 가졌어도 활짝 웃지를 못하는

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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