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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빠

by 김대호


자운대가 목련으로 덮일 때 즈음 소식이 전해졌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급히 일정을 조정했다.

주말에 아버지, 형과 함께 서울 장례식장에 가기로 했다.


큰아버지는 부리부리 큰 눈에 엄한 인상을 지니신 분이다.

그 자신의 아들들인, 사촌 형들에게도 엄하셨던 걸로 기억난다.

목사로서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실 때도 갈라진 목소리가 힘이 넘쳤다.

하지만 내게는 화내신 적이 없으셨다.


서울에 사는 큰집 식구들은 명절이 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기 위해

지금보다 몇 배로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몇 시간을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매우 지친 상태로 우리 집에 도착하곤 했다.


열 살도 안된 나는 지쳐서 도착한 큰 아버지께 언제 서울로 돌아가실 계획이냐고,

몇 밤 자고 갈 거냐고 묻곤 했다.

더 오래오래 있다가 가라는 마음을 담은 질문이었다.

큰아버지는 매번 오래오래 있다가 갈 거라고 대답하셨다.

어린 나는 그 대답에 마음이 놓았다.


하지만 끔찍한 도로 사정 때문인 지는 몰라도

큰집 식구들은 다음 날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아침에 훌쩍 떠날 준비를 하셨다.

나는 아쉬움과 약간의 배신감에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울먹이는 내게 큰아빠는 초록색 용돈 몇 장을 쥐어주셨다.

나는 아쉬움과 기쁨이 뒤섞인 감정에 혼란을 느끼며 멀어지는 큰집 자동차에 손을 흔들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나는 방학이 되면 서울 큰집에 단신으로 놀러 갔다.

어머니가 큰집에 갖다 주라고 한 봉다리가 가득 싸준 마당에서 키운 채소와 토마토를 들고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서울 터미널에 도착해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이내 작은 사촌 형이 와서 혼자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냐고 놀라며 짐을 챙겨주었다.


빌딩 숲이 뒤덮인 복잡한 서울 도로와 지하철 역 사이사이를 사촌 형은 이리저리 쏙 잘 빠져나갔고,

나는 졸졸 따랐다.

처음 지하철을 타고 창 밖을 멍하니 봤던 첫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큰집에 도착해 집에서 가져간 채소로 만든 반찬에 큰집 식구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

큰아빠는 대호 재밌는데 데려가라고 형들에게 용돈을 주셨다.

형들을 따라 동네 오락실, 시내 피시방, 놀이공원까지 나는 신나서 졸졸 따랐다.


오락실에는 청주보다 험악한 형아들이 많아서 긴장했고,

피시방에서는 작은 사촌 형의 지시대로 저그족 히드라를 무한으로 뽑아 테란과 프로토스 기지를 부시고 다녔다.

놀이공원에서는 기껏 멀리 가놓곤 청용 열차 한번 타고 세상이 빙빙 돌아 사촌 형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날 밤에는 자다가 구토까지 해서, 사촌 형이 큰 고생을 했다.

나 어떻게 조종사가 됐을까…


이 때는 명절과 달리 내가 서울에 놀러 간 것이기에,

나는 몇 밤 자고 내려오는 제한이 없이 마음먹은 만큼 충분히 놀아야만 청주로 오는 버스를 탔다.

돌아온 시골 본가는 조용하고, 헛헛했다.


시간이 흘러 몇 년 전

서울 남산의 야외결혼식장에서 큰 사촌 형이 결혼식을 올렸을 때 큰아버지를 오랜만에 뵈었다.

수척해지셨지만 어렸을 때 뵀던 큰 눈동자와 나를 보고 반갑게 웃는 인상은 그대로 셨다.

나는 서울 큰집에서의 신세와 축하의 마음을 담아 열심히 축의금을 받고, 기록하고, 계산했다.

달러 지폐까지 있었지만 한 번에 계산이 맞아 역할을 다한 듯 흡족했다.


그렇게 남산에서 뵈었던 큰아버지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이 마지막인 줄 몰라서 그날의 기억은 아름답게 기억될 수도 있었겠다.


그 여름 햇빛 나리던 남산처럼 따듯하고 평안하게 쉬세요.

몇 밤 더 자고 가라고 외쳤던 목소리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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