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저귀를 갈다가 깨달음을 얻다.
아들 이강이가 태어난 지 백 일이 지났을 무렵의 일이다.
강이의 기저귀 틈으로 묽은 변이 흘러내려 내 바지와 다리에 묻었다.
나는 극도로 깔끔한 사람은 아니지만,
갑자기 찾아온 불결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화의 방향을 정할 순 없었다.
문제없이 변을 봐준 어린 이강이를 탓할 수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고마운 기저귀를 탓할 수도,
그렇다고 당연히 내 탓도 아니며, 나는 오히려 피해자였다.
가해자는 없고, 억울한 피해자만 있는 상황에서
피어난 화는 방향을 잃고 내 머릿속과 가슴 사이를 왕복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스러운 물의 성질처럼,
사람이라면 여러 이유로 생겨난 화를 방향을 정해 내고 싶어 한다.
부당한 이유나, 정의롭지 못한 사람, 적절치 못한 상황으로 화의 방향이 정해지면 다행이겠다.
하지만 혹자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수고보다
엉뚱하게도 자신에게 편한 이에게 화의 방향을 손쉽게 돌린다.
그런 방향은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약자일 수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일 수도 있다.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 쪽으로의 화의 방향은 그로 인한 상처,
즉 화상을 남길 것이다.
물처럼 이유가 필요 없이 흐르려는 화의 방향성을 잘 살펴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만약 서두에 얘기한 것처럼 화의 방향을 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 글을 쓴다.
(좋은 생각이 있으면 남겨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