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력을 잃은 현대인으로서 고함
어릴 적 우리 집은 거실의 텔레비전이 항상 켜져 있는 가정이었고, 리모컨으로 대표되는 채널 주도권은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다.
나는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그게 뭐 하는 프로그램이냐 라는 질문과 함께 웬만해서는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틀어주셨다.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아버지께 그것은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 양보였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도 9시 땡 알람과 웅장한 시그널 음악으로 시작하는 아홉 시 뉴스에는 꼭 채널을 양보하지 않고 뉴스 채널로 돌리셨다.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되는 사회 전반 사건을 심각하게 이어가는 아홉 시 뉴스를 그래도 참고 볼 수 있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충청도에 태어났기에 선택권 없이 팬이 된 빙그레 이글스 야구 결과소식이 기다려졌고,
나머지 하나는 뉴스의 막바지에 신기한 장면들을 보여주는 스포츠 진기명기라는 코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어떻게 저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라는 놀라움을 주는 코너였다.
대형 방송사만의 국제적인 정보력으로 입수한 장면이 아니고서는 놀라운 장면을 볼 기회가 흔치 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예전 하루에 한 번 밖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장면들을 요즘에는 마음만 먹으면 sns와 동영상 어플을 통해 밤 새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는 SNS에서 내가 팔로우한 사람들의 정보만 업로드 시간 순서대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SNS 회사들의 전략이 시나브로 바뀌어 이젠 내가 팔로우한 사람들의 소식들 사이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기업들의 정보를 끼워 팔고(?) 있다.
결국 지금은 sns에서 친구들의 소식을 보다가도 중간중간 매복해 있는 나와 관련 없는 정보와 영상들을 무시하지 못하면, 쇼츠를 비롯한 현대판 ’ 진기명기‘ 영상들로 빠지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적어도 내게는 일어나고 있다).
더 심각한 점은 그러한 장면들이 눈길만 끌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좋아요 클릭만 유도할 수 있다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든 일어나지 않은 일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진실인지 조작인지 알아낼 노력을 들이기에는 영상이 너무나 많으며, 그럴 시간에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는 편이 속 편하기 때문이리라.
요즘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듣게 되는 정보에 따르면 이러한 현대판 네버엔딩 ‘진기명기’ 영상들은 우리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분비시킨다.
도파민은 행복전도사라는 별명답게 활동, 의욕, 행복감, 흥미 등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준다.
어릴 적 내가 어른들의 뉴스라는 힘든 시간을 견디게 만들어준 것도 이러한 도파민을 맛보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고통스럽게 기다릴 필요 없이 신기한, 대단한, 아름다운, 놀라운, 끔찍한 장면과 영상들이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으로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어릴 적 하루를 기다려야 조금 분비될 수 있었던 도파민이 이제는 15초마다 한 번씩 영상을 누르는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분비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신경전달물질인 만큼 연약한 인간은 손쉽게 도파민 중독으로 빠질 수 있다.
지하철을 타든, 버스를 타든, 사람들이 모여있는 어느 장소에 가든 볼 수 있듯 전 세계 사람들이 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회이다.
마약, 알코올보다 손쉽고 합법적으로 ‘진기명기’ 도파민 중독에 빠질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개인들의 노력과 관계와 애정으로 만들어진 행복이 아니라 영상으로 만들어진 제조된 도파민, 제조된 행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세상이라는 시각과
동시에
sns 회사들이 전략을 바꾼 사례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영상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을 통해 누군가는 사람들에게 도파민을 팔고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우리는 지금 진실과 집중력, 온전한 정신을 지키기 쉽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