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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호 Sep 05. 2023

내 이름은 빨강.

책을 덮으니 펼쳐지는 다섯 가지 빨강 단어.

알와시티, <한 사내를 만나는 아부 자이드와 사루즈>, 알 하리리 작, 1237년, 파리국립도서관


문체.

오르한 파묵 작가는 한 가지 시점으로 글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 나아가 적절한 시점에서는 악마, 나무, 개, 시체, 금화, 빨간색의 입장에서 글을 써 나간다.

각각 입장에서의 문체가 섬세하게 달라 한 사람이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다른 인물과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책을 읽게 된다.

튀르키에 작가의 모국어 문체를 직접 이해하면 놀라움은 배가 되었을 텐데 안타깝다.

그런 날이 올까.


이슬람.

나는 동아시아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크리스천으로 살고, 한미 연합군의 일원으로 반평생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이슬람 문화에서의 술탄과 샤, 예술과 그들의 결혼, 사랑, 가족, 풍습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거의 처음으로 꽤 깊이 알게 되었다.

누군가 말했다.

오르한 파묵이 쓴 이야기를 읽은 조종사라면 그래서 이슬람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고 이슬람 인들도 같은 인간임을 이해한다면 중동에 무미건조하게 폭격을 할 수는 없었으리라.


세밀화가.

이슬람 화원의 세밀 화가들이 가진 이상적인 삶의 결말은 대가들의 아름다운 그림을 지독히 보며, 밤새 그들의 작품을 모방하여 그리다 결국 삶의 말미에 눈이 멀어 버리는 것이라 한다.

혹은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자기 손으로 자신의 눈에 바늘을 찌르는 것.

눈이 생명인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서늘해지는 부분이었다.


사랑.

그 와중에 사촌인 두 남녀, 정확히 표현하면 전쟁에 나간 남편의 죽음이 불확실하기에 남편의 남동생으로부터 욕정을 강요받는 미망인과 미혼남이 미망인의 부친이 살해되는 상황에서 극한의 두려움에 빠지지만 공황에 빠지지 않고 상황을 극복하여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이 평생 무한히 행복했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한 가족의 모습이라는 것.

그럼에도 그들이 사랑받는 소설의 주인공들이라는 것.


기법.

종교와 같은 기존의 작화 기법에 새로운 기법이 나타나 충돌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자세히 지켜보게 된다.

최대한 개인으로서 흔적이 남지 않는 그림이 인정받는 기존 이슬람 관념으로 볼 때 원근법을 적용하고 인간이 중심인 작화법 나아가 화가 자기 자신을 중앙에 내세운 초상화라는 지금은 일반적인 기법이 사실은 신성모독으로 그리는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기법이 충돌할 때 여러 세밀 화가들이 죽고, 눈이 멀고, 불구가 되고, 폭동이 일어나는 임계점에서 벌어지는 소설 속 장면을 곱씹어 볼 때, 현존하는 그 많은 기법들 하나하나를 가벼이 볼 일이 아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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