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이 내게 말한다.
무더운 방에 열두 명의 남자들이 앉아 있다.
그들은 아버지를 찔러 죽였다는 의심을 받는 아이가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정할 배심원들이다.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아져야 나갈 수 있는 무덥고 좁은 방.
살인현장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증인들의 증언이 있었기에 방의 분위기는 유죄 쪽으로 흘러간다.
유죄로 배심원들이 평결을 내린다면 소년은 사형이 확정된다.
모두가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한 거수투표에서 한 남자가 소년이 무죄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한다.
거친 반발 속에서 그는 조용히 본인의 소신을 펼친다.
99퍼센트의 확률로 유죄더라도, 1퍼센트의 무죄 가능성이 있다면 그 1퍼센트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하며,
그 논의의 결과가 한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는 것.
좁은 세트장에서 12명의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를 통해 99퍼센트의 유죄에 대한 확신은 사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 즉 편견과 오해, 이기심, 착각, 한계의 총합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한 가지, 한 가지씩 인간의 불완전함이 드러날 때마다 유죄의 가능성은 줄어들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 지닌 한계라는 거울로 자신과 타인을 비추게 된다.
결국 열두 명의 배심원이 모두 소년이 유죄가 아님을 인정하곤, 다시 그들의 일상으로 사라진다는 이야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사형제도에 대한 부활 논의가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영화는 인간이 타인을 살해할 수 있는 어리석은 존재인 것은 맞으나, 동시에 온전히 완벽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고 내게 이야기한다.
사형제도의 부활 문제는 사형해 마땅한 죄악에 대한 분노로 결정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내리는 판결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정해져야 할 것이다.
나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직이 말한다.
“Not guil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