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음악이 나오는 버스를 타다

by 율팬

날이 흐리다. 비는 내리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은 뚝뚝 떨어져
버스럭켈켈켈 밭은 기침을 해댄다.


나는 무덤덤히 밟고 지나간다.
빌린 책 반납하러 도서관 가는 길
앞서 걷는 할머니의 굽은 등이 보이고
학교 파한 아이들의 앳된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여전히 무덤덤히 횡단보도를 건넌다.


버스가 왔고, 나는 버스에 올랐다.
차창에는 김이 서리고 버스 안은 훈훈하다.
창밖으로 스치는 간판들
나지막이 흐르는 음악 -
문득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엄청나게 지독했던 고 3 겨울방학
그리고 대학 오리엔테이션,
눈꽃처럼 꽃잎 날리던 러브로드와 시베리아 잔디,
짙은 향내로 사람을 취하게 하던 아카시아 그늘,
인문대 잔디밭 앞 민주광장의 최루탄 가스와 봄밤,
막걸리병이 나뒹굴고
사랑 땜에 울고 웃던 친구와 선배도 기억이 난다.


그 겨울에서 다시 봄, 또 몇 해가 바뀌기까지
나는 어느 부잣집 아이의 가정교사도 되었다가
돈가스를 안주로 파는 호프집 아가씨도 되었다가
서무실 보조도 되었다가
번화가 뒷골목의 분식점 알바생도 되었다.
이디오피아 난민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우수작을 고르며 체신청 사무실에 앉아 웃다가 울기도 했고
까까머리 중학생 아이들의 어설픈 선생님이 되어 같이 낄낄거리기도 했다.


이제는 모두 사라져버린 내 기억 안의 풍경들......
삐끄덕거리던 구학강당 의자와 텅빈 동아리방,
빛바랜 잡록 한 귀퉁이에 화석처럼 굳어 있는 게
더 어울릴 법한 추억들이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버스 창 밖으로 스쳐 보인다.


언젠가 한번 가본 듯한 익숙한 길을 가며
어디선가 그리운 사람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 마음 설레듯이
버스 안, 그 따스하게 말 거는 온기에 나도 몰래 마음이 술렁거린다.


지나고 멈추고 지나고 또 멈추고……
10년, 20년 후의 나 또한 오늘의 나처럼 버스를 타고 가다
울컥 그리워지는 무언가에 목이 메일까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내가 덤덤히 바라보듯
내일의 나도 오늘의 나를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을까……


2004. 어느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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