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경북대학교병원 소아과 55병동, 불 꺼진 복도는 길고 어둡다. 면회 온 사람들도 하나둘 돌아가고, 혈액암 병동의 밤도 깊어간다. 이곳이 곧 집이 된 아이들은 밤의 적막을 따라 고요히 잠들고, 6인실 병실, 아이들을 지키는 엄마나 아버지는 아이가 잠든 침대 옆에 낮은 침상을 꺼내 선잠을 자거나 새우잠을 잔다. 짧게는 1-2주, 길게는 1년여를 이곳 병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에겐 하루하루 살아 있는 날들이 암세포와의 피 말리는 전쟁이다.
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5월, 졸업 여행을 얼마 앞두고 입원을 했다. 처음엔 가벼운 감기려니 했다. 다만 종아리에 검푸른 멍이 들어서 왜 그런가 하고 병원을 찾았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 동생은 채 몇 달을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다. 고 3이었던 내가 주말에 병원을 찾았을 때까지도 나는 병명을 알지 못했고, 동생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병실 제일 구석 침상, 환자복을 입은 동생이 “누나”하고 불러서야 겨우 알아보았다. 동생은 괴기영화에나 나올 법한 새빨간 핏빛 눈이 되어 있었다. 병원에선 당시로서 쓸 수 있는 모든 약을 단 일주일 만에 썼다고 했고, 그래서 실핏줄이 터져서 그렇다고 했다.
동생이 입원하기 전, 우리집은 아양교가 내려다보이는 13번 도로 쪽 언덕의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가 꿈에도 그리던 빨간 이층집. 묵직한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넓직한 마당이 있고, 왼쪽으로는 대여섯 계단을 올라 건물이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결 고운 마루 거실에 원목 느낌이 나는 은은한 벽, 거실도 주방도 따로 되어 있는 집이었다. 게다가 아늑한 방이 세 개여서 동생과 나는 다른 방을 쓸 수 있었고, 건물 밖으로 난 이층 계단을 올라가면 그곳은 또 별도의 공간이었다.
그 집은 엄마와 아버지가 우리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며 허리띠를 졸라 마련한 꿈이자, 자랑인 집이었다. 하지만 우리 식구들은 그 집에서 온전히 살지 못했다. 아버지와 엄마, 할머니, 그리고 나, 모두가 교대로 동생 곁을 지켰다. 아버지는 부대 일을 마치면 곧장 병원으로 오셨고, 엄마도 저녁 6시, 퇴근을 하면 바로 병원으로 왔다. 낮에는 할머니가 계시고 야간 자습을 빼고 나도 병원으로 갔다.
봄이 가고, 여름,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이어지는 검사에 약물 치료, 항암 치료, 수혈이 계속 되자 혈관은 점점 속으로 숨었다. 두 팔과 손, 발을 번갈아 바늘을 꽂은 뒤에는 목과 머리에다 꽂기도 했다. 수혈 팩으로 수혈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아기들용 수혈기계로 피를 억지로 밀어 넣다 새벽에 온 사방 벽으로 피가 튀기도 했다. 항암치료가 반복 되자 동생은 점점 먹지 못했다. 위가 헐고 항문이 헐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머리칼도 다 빠져 버린 동생은 고통을 참지 못해 결국 치료용 ‘마약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루 한두 번이던 주사가 열 번을 넘어 가던 어느 날, 엄마와 나는 크게 한 번 싸웠다. 주사를 놓아주라는 엄마와 안 된다는 나.
“엄마, 나중에 석이가 주사를 못 끊으면 어쩔래!”
“야이야, 그래도 놔 줘라. 저렇게 힘들어 하는데…….”
그날 저녁 동생은 가만히 내게 말했다.
“누나, 미안해. 그래도 엄마한테는 그렇게 화내지 마라.”
인간이 참을 수 있는 슬픔은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얼마나 참아야 행복이 오는 걸까. 이듬해 2월, 동생은 우리 곁을 떠났다. 식구들은 모두가 말을 잃었다. 엄마 아버지의 꿈이었던 집은 팔렸고, 그나마 엄마가 마련해 둔 법원 앞 아파트로 이사를 했지만, 처음부터 정이 안 들던 집, 어둡고 침침한 집. 할머니는 당신이 죄인이라며 방에서도 잘 나오지 않으셨고, 정 많고 자상하던 아버지는 술에 의지하다가 동생이 떠난 몇 년 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날 이후, 엄마는 억척스럽게 변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엄마는 간 곳이 없었다. 눈을 뜨면 일을 가고, 집에 오면 쓰러져 잤다. 어떤 날은 술을 먹고 울기도 했다. 그 와중에 또 여동생은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았고 거리에서, 학교에서 쓰러지기 일쑤였다. 눈부신 햇살 아래 학교 운동장에서 동생을 업어오던 날들, 병명조차 나오지 않는 동생을 다시 경대병원에 입원시키고, 이해 못할 수많은 일상의 연속.... 다른 아이들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니 휴학을 권하던 학교, 결국 격년으로 여동생은 2년 간의 휴학, 목발을 짚고 복자성당을 찾아가고 퇴마의식을 치르고.... 열한 살 터울의 막내는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사실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터널을 지나던 시절, 대학 졸업 1년 뒤 결혼을 핑계 삼아 나는 서울로 떠나버렸다.
사람에 대한 기억이란 것이 함께 나눈 말과 행동, 같이 울고 웃었던 시간의 기록이라면, 사실 나는 엄마에게 살가운 딸이 아니었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엄마를 원망했다. 남동생이 죽고 막내가 뻗나가게 된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엄마 탓이라고 여겼다. 풍비박산 난 우리집의 모든 책임을 엄마 탓으로 돌렸다. 시험 점수 올리기에 급급했던 내가, 책만 파면 되는 줄 알았던 천하의 맹꽁이가, 어떻게 다섯 식구 생계를 책임진 여인의 두려움을 알았을까. 아들과 남편을 잃은 여자의 절망과 깊은 슬픔을, 그때의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엄마 마음을 좀더 살폈더라면, 식구들 모두 짐을 덜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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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만에 엄마와 함께 온 청송이모 댁, 과수원은 사과로 그득하다. 엄마와 나는 고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과수원 안쪽부터 바깥쪽으로 나오며 광주리에 낙과를 주워 담는다. 싱싱한 것도 있고, 썩어 들어가는 것도 있다. 금세 여덟 광주리가 다 차 버렸다.
“에헤이, 그거 주워 놓고 땀을 그렇게 흘리나? 처제도 이제 다 됐네.”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던 이모부 말씀에 엄마가 수줍게 대답을 한다.
“형부, 나도 벌써 환갑이 넘었어요.”
사과보다 더 빨개진 볼에 땀을 송송 흘리는 엄마. 아버지 곁에서 사과꽃처럼 환하게 웃던 엄마가 어느새 저렇게 나이가 들어버렸구나.
“너어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정말 좋았을낀데….”
이모부 말씀에 온 식구가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식구들을 위해 해마다 산에 가서 약초를 캐고 약단술을 끓이던 할머니, 막내 가진 엄마를 위해 가물치를 잡아오고 가마솥에 끓여서 뽀얀 국물을 내어주던 아버지. 공장 일을 마치고 고픈 배를 쥐고서도 자식들 줄 거라고 풀빵 봉지를 꼭 쥐고 집으로 오던 엄마. 빨간 내복을 입고 나를 찾아왔던 여동생, 시골길을 함께 걸었던 남동생, 원숭이처럼 생겼다고 놀래댔던 막내…. 불행이 우리를 덮치기 전 부모님이 지켜주는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우리 사남매는 꿈을 키우며 그렇게 살았는데, 아무리 세상살이가 부대끼고 힘들었어도 아버지 가신 뒤에 남은 우리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엄마와 나는 그렇게 오래 소원하지 않았을지도......
이모가 박스 몇 개를 가져오며 실한 놈으로 담으라 한다. 딸 때를 이미 놓쳐 버린 사과들, 하지만 그나마 썩지 않아서 다행이다. 모든 게 때가 있다는데, 더 늦기 전에 말해야지. 엄마, 미안해, 내가 이제 잘할게. 말로 하지 못한 나의 마음을 한 알 한 알 정성 들여 닦는다. 엄마가 가져갈 상자 가득 채운다.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