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이던가 81년 겨울쯤으로 기억한다.
그날은 몹시 추웠다.
손이 곱아서 손가락을 제대로 못 펼 정도로 ...
칼날 같은 바람이 쌩쌩 부는 아침,
“아이고, 보리쌀이 다 떨어졌네.”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부엌으로 통해 있는 쪽문 쪽에서 들려왔다.
아버지랑 엄마는 일 나가시고
동생들은 언제 벌써 놀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고.
여하튼 무슨 생각에서 출발을 했는지,
돈은 또 어디서 났는지,
벼 다 베고 남은 그루터기 황량한 들판 가로질러
봉지에 담아 파는 보리쌀을 가슴께에 겨우 얹고는
낑낑거리며 들고 오는 초등학생 내가 보인다.
보리쌀 파는 곳, 원래는 우리 동네 21번 버스의
종점 로터리에 있던 정미소에서 보리쌀을 팔았던 것 같은데,
그곳이 그날 문을 닫았었는지,
아니면 이미 다 팔리고 없다고 그랬는지
이웃 마을, 약 2㎞쯤은 족히 되는 거리에 있던
쌀집까지 가게 되었는데...
어떻게 셈을 치렀으며
어떤 보리쌀을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비포장길 먼지를 제법 뒤집어 쓰고
스산한 바람 부는 과수원 울타리
탱자나무 마른 가시장구 사잇길을 한참 걸어
저만치 집 지붕이 거의 눈에 들어올 때쯤
일 나간 엄마 대신
우리 사남매를 거의 다 키우다시피하신 할머니
그 곱고 보얀 머릿수건 자그마한 어른이
나를 보고 저만치서 달려오실 때
나는 더 이상 한 발도 가지 못하고
논바닥에 퍼들썩 앉아 울어버렸던 기억
“아이고, 이 손 좀 봐라. 얼음장이네.”
땅바닥에 떨어진 보리쌀보다
맏손녀 언 손을 먼저 걱정하시며
당신 가슴에서 한참을 녹여주시던 할머니 -
그 저녁 밥상도 보리밥이었지 아마.
할머니의 구수한 된장국과 함께
오래오래 그리운 그해 겨울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