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행 새벽기차를 기다리며

by 율팬

#1.

진주행 새벽기차를 기다리던 플랫폼에서

대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선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차림은 너무나 허술하여 뼛속까지 시린 바람 부는 듯했습니다.

삶의 쓸쓸함 자아내는 주름 깊은 얼굴의 아버지는

자신의 낡은 양복 저고리를 벗어 아들에게 입히려 했지만,

반소매 차림의 어린 아들은 왠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습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종착역에서는 곧 헤어질 것만 같던 父子 -

아버지는 연신 안타까운 눈빛으로 아들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아들의 몸이 데워지기라도 하듯

정작 자신은 갈팡질팡 길 잃은 사람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기차가 오기까지 내내 그렇게 어린 아들의 손을 잡았다

또 저만큼 갔다 왔다를 반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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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석 다음날 아침 출근길, 소슬한 바람 부는데

경상감영공원 벤치 군데군데서 막 잠 깨어 일어나는 부랑자들 보면서

뜬금없이 문득, 그 새벽 생각이 났습니다.

그 날은 유난히 안개가 짙었습니다.

간헐적인 통소리, 투둥투둥 긴 호른 소리,

어쩌면 간신히 불어본 단소에서 나는 것 같은 소리

치기치기 푹푹 치기치기 푹푹 처러럭 처러럭...........

흔들리는 기차는 그렇게 세월의 태엽 감기는 소리를 내며 진주역에 닿았고

중산리 매표소 가는 길 내내 그 짙고 불투명한 개스는 걷힐 줄을 몰랐습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지리산 정상에 오르지도 못하고 길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살면서 길을 잃을 때가 있지요.

그날의 그 아버지나 벤치에서 잠든 그들도 잠시 길을 잃고 헤매거나 쉬거나

그런 것일지도 모르구요, 나라고 뭐 제대로 가고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구요.

어쨌든 용케도 우리 일행은 길 잃지 않고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기차에 오른 후 그 부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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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늘 문득 그 날의 기억이 새삼 떠오르는 것은

순간순간 사람을 참 목 메이게 하는 삶의 쓸쓸한 단상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금요일이면 무료 급식에 맞춰 줄을 서는 사람들,

해가 지면 삼삼오오 짝을 찾아 나서는 황혼의 노인들,

아예 내놓고 돈을 달라며 구걸하는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 -

일일이 말로는 다 못하고 지나지만 가슴에 오래 남아

혼자일 때 가만가만 뒤돌아보게 되는 일상.

그런 것들이 '길'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그날의 기억을 불러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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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는데,

낙엽 가득한 숲 속에서 혹은 도심 한 가운데서라도

모두들 길 잃지 마십시오.

나침반 하나 대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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