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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의미의 포용성

포용성에 관한 글

정치인이나 언론, 이제는 기업들까지 포용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는 게 그들의 주된 논리인데, 조금 웃긴 부분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포용성을 주장하지만, 본인과 생각이 다른 대상에게는 포용성이 없다고 오히려 비난을 한다.


잠깐, 그러면 도대체 누가 포용성이 없는 건지 고민이다. 포용성이라는 것이 선택적으로 존중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전체를 인정하고 다른 부분 마저도 함께 가는 것인가?

내가 포용할 수 있는 것만 포용한다면 그게 진짜 포용력이 있는 것일까?


나는 스스로 포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포용할 수 있는게 진정한 의미의 포용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포용이라는 것은 비효율적인 가치다. 잘하는 것은 개발하고 못하는 것은 버리는 편이 이익 관점에서 효율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포용을 못한다고해서 무작정 욕할 수는 없다. 포용을 못하는 것마저 받아들이는게 더 성숙한 태도다.

진정한 의미의 포용성을 실천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 진정성 측면에서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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