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사직

by 이인삼각

인사 실장이 회의를 요청한다. 연말 조직개편 초안을 보고한다. 주요 임원들과 내년 각자 조직 관련 인터뷰를 마쳤고, 더해서 인사실의 의견이 담긴 취합 안을 가져왔다. 특히 올해는 신임 부사장이 부임한 첫해. 내년 사업계획 달성을 위해서 어떻게 조직을 가져가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


사업조직을 대폭 간소화 했다. 부사장 산하 두개 총괄직은 사라지면서 부사장-총괄-부문장 3단계가 부사장-부문장 2단계가 된다. 예상했던 결과다. 부사장을 선임했을 때 부터 기존 총괄의 역할은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인사 실장은 부문장 인선도 대거 조정이 불가피 하다는 설명과 함께 부문장 후보들의 이름과 새로운 조직도는 다음 페이지에 설명되어 있다고 한다. 놀라지 않으리라 미리 다짐을 하면서 페이지를 넘긴다.


낯선 이름들이 보이고, 낯 익은 이름들 몇몇이 보이지 않는다. A 팀장을 새롭게 부문장에 발탁했구나, 늘 조용하고 티가 안 났었는데 과연 리더십이 있을까, 의문이 드는 사이 눈은 계속 익숙했던 이름들을 여기저기 찾고있다. 특히, 나를 잘 따르던 이름 몇몇이 안보인다. 조직도 그림 안의 크고 작은 박스들을 이리저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내 궁금함을 눈치 챘는지, 몇몇 누락된 리더들의 거취는 계속 고민중이라 한다. 알겠다 하고 보고를 짧게 마쳤다. 새로 부임한 부사장의 고민이 컸으리라. 지난 6개월 지켜보면서 자신의 조직을 어떻게 가져 가야할 지 나름 심사숙고 했으리라. 새로 리더로 신임한 이상 그의 인사권을 존중해줘야 한다. 이제 남은 숙제는 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가 남았다.


몇일 뒤 초안을 놓고 이사회 인사위원회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몇몇 누락된 리더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견을 묻기에 다른 업무로 재배치 하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본인들의 계속 근무 의지가 확인된다면 경험과 장점을 되살 릴 수 있는 업무로 재배치를 하는 것이 좋다.’ ‘리더의 위치에 오르기 까지 이미 여러차례 능력은 검증이 된 것이고,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는 역할은 다수 있다.’ ‘서비스업의 특성상, 수시 확장성을 위해 검증된 리더들의 잉여는 어느정도 필요하다.’ ‘과거에도 재배치를 통해서 회사가 함께 동행하려는 선례가 있었고, 이는 조직원 전체에 회사에 대한 충성도 제고에 기여하는 독특한 문화로 존재한다’는 장점들을 열거했다.


반론이 시작되었다. 그런 소위 재배치 문화도 변화가 필요한 것 아닌가? 과거의 실적은 과거일 뿐, 올해 실적과 업무 결과에 따른 객관적 평가에 따라 의사결정 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어떤 위치이던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찾고 역할 부여가 중요하지,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재활용이라는 차원에서 재배치 하는 것이 옳으냐. 오히려 새로운 사람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재배치 라는 명분은 전체를 위하는 것 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전체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이후 팀으로 일하는 것에도 장애가 될 수 있다. 과연 신인 팀장이 눈치 보지않고 과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반면 팀원으로 새롭게 조정된 사람의 경우 실제 팀원처럼 열정적으로 일 할 수 있겠는가?


사실 과거의 상사와 함께 동등한 입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또는 팀원으로 일을 시켜야 것은 많이 불편하다(비록 다른 팀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불필요한 에너지가 서로 소모되니 비효율이다. 그래서 대다수 조직들이 연말에 그러한 수고와 불편을 피한다. 회사에서는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일은 더 이상은 없다라고 집으로 보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지 쉬운 선택을 하는 것이고 비겁한 것일 수 있다. 그의 경험과 역량이 유효하다면 함께 일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다시 팀원이 되는 사람도 잠깐 창피하고 속은 상하겠지만 그래도 함께 가는 것의 장점이 실질적이고 크다. 계속 기여할 수 있고, 기여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여긴다면 모두 함께 일할 수 있지 않은가?. 왜 계속 위로만 위로만 오르고 승진해야 자신의 본질 가치가 유효하다고 말하는가? 오래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례를 만들고 싶었고, 나 자신도 그런 사례의 본이 되고 싶었다.


나머지 임원들의 의견을 모두 들어 보자 누군가 제안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고 재능과 장점을 잘 알기에 각자 조직에서 혹시 필요한 역할이 있는지 의견을 듣기로 했다. 사실 두명의 임원이 내게는 따로 연락 와서 본인 조직에 누구누구를 데려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고려했으나 취소하겠다고 한다. 실적, 역량보다 태도 문제 이야기를 한다. 문제해결 협업에 부정적이었다고 이유를 밝힌다. 늘 태도가 좋았던 이유로 총괄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 올해는 왜 태도가 좋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일까? 각자가 갖고 있는 각각의 기억들과 기억들이 다툰다. 누구의 기억이 옳은 것인가?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다르고 다양하고 어려운 일이다.


더 이상 재배치 의견이 머물 자리가 없었다. 회의가 길어지면서 임원들 피곤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뛰어야 하는 똑같은 입장. 내년 이맘때 내가 저런 재배치 후보 자리에 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독하게 임해야 한다. 배려하고 포용할 여유가 없다. 내년 사업계획 달성에 대한 부담들이 상당하다. 장기적 회사의 문화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내년에는 실적을 오르막으로 반드시 반등 시켜야 한다. 단기간 실적에 집중해야 할 때이고, 지금 잉여는 없다. 회의는 끝났고 후보들을 집으로 보내기로 한다.


하급 관리자 시절부터 밝은 얼굴, 참신한 기획, 그리고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뛰어난 조직 장악력으로 위기를 극복해주었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연봉을 조정하고 직위를 낮추더라도 계속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지만 회사는 거절하기로 했다. 12월 1일 인사 명령이 게시될 것이다.


아직 아이들이 중학생일텐데, 회사 행사에서 본 그들의 가족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 중 한 명의 큰딸이 올해 고3이라는 기억이 났다. 12월 3일이 수능인데, 12월 1일 아빠가 회사에서 잘렸다는 소식을 듣게 될 그의 딸이 생각났다. 인사 실장을 불렀다. “조직 발표는 12월 4일로 합시다”. 수능 전까지는 그 딸에게 아무 소식도 전달되지 않았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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